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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y 10. 2021

편의,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

<편의점 사회학>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편의점에 갔다. 딱히 살 게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유난히 고된 날에는 꼭 편의점에 들러 짜고, 맵고, 달고, 시원한 걸 사간다. 집 바로 앞 할인마트를 지나치고 좋아하는 PB상품이 많은 지에스 25에 들렸다. 수입맥주 한 캔, 눅눅한 닭다리 하나, 삼각김밥 하나, 내일 먹을 샐러드 하나에 한 시간 시급을 반납한다. 집에서 하루의 피곤을 녹이며 오늘도 잘 샀다고 생각한다.”

  “옷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 오래 신어 낡고 헤진 스타킹 무더기가 나왔다. 신을 수 있을 만한 스타킹은 없지만, 뭐 당장 치마를 입을 일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시키거나 집 근처 속옷가게에서 사면 한 장에 천원도 안 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그런데도 미룰 대로 미루다 필요한 당일 편의점에서 2천원을 주고 스타킹을 샀다.”

  “늦잠을 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학 탐방을 왔으니 소개를 해달라는 고등학교 후배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이 몰골로 후배들을 만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화장품 매장까지 갈 여유도 없었다. 빵이나 먹고 가자 하고 들린 편의점에서 평소 즐겨 쓰던 저렴한 화장품 브랜드가 입점된 게 아닌가! 세안용품과 입술에 대충 바를 만한 걸 급하게 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비디오 게임이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게임 전문점, 대형마트와 함께 미니스톱이 구매처가 됐다. 내 선택은 당연히 집 바로 앞에 있는 미니스톱이었다. 몇 해 전, 이 시리즈 전작의 유료 아이템을 일본 세븐일레븐에서 장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또래는 편의점이 익숙한 세대다. 앞서 나열한 경험담은 내 편의점 인생 단편의 단편도 안 되는 조각글이다. 2019년 4월 기준 편의점의 점포수는 4만 개를 넘어섰다. 2012년 2만여 개에서 10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2만여 개가 증가한 수치로, 편의점은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에서 중심이 됐다. 편의점의 발상지인 미국보다, 최대 부흥지였던 일본과 대만보다도 점포수가 많다. 편의점의 어떤 점이 한국 사회와 공감할 수 있던 것일까.


  도시에 온 이후 내겐 더 많은 돈을 주더라도 뭐든 편의점에서 사는 불합리한 소비습관이 생겼다. 남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편의점의 알 수 없는 안락함과 쾌적함이 날 그렇게 이끌었다. 언제부턴가 구멍가게 정 많은 사장님의 관심과 배려는 나에게 친절이 아닌 부담이 되었다. 퇴근만을 바라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무표정과 기계적인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이 세 마디만이 내게는 가장 큰 배려요, 친절이다. 간혹 오지랖 넓은 점원이(이 경우 보통 사장이다.) 몇 마디 대화를 걸어오면 오히려 당황하기 일쑤다. ‘자상하다’, ‘친절하다’라는 수식어 대신 오지랖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나의 이런 태도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편의점에서 무인 계산대를 보고 속으로 박수를 치는 지경에 이른 것은 내 타고난 성질머리만이 이유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편의점만의 ‘무관심의 배려’, ‘거대한 관대’는 몇 백 원 돈을 더 주고 바꿀만한 가치였다. 더불어 한결같은 조끼 유니폼과 점원의 표정, 어딜 가도 비슷한 가게의 외관과 내부 디스플레이의 익숙함 역시 편안함을 주는 요소였다. 그러나 이런 안락함은 어쩌면 편의점 시스템의 취약점이 낳은 부산물,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져가는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지고 보면 편의점의 시스템은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다. 더 빨리, 더 많이 팔기 위한 것에만 초점을 두고 설계됐다. 진열 또한 최대한 합리적인 쇼핑을 위해 과학적으로 구성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행동과 표정은 사실 기계로 대체되더라도 크게 다른 점은 없을 것이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인간성이 실격되는 대신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 된 것이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멀지 않은 과거 구멍가게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가게는 장사만 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자라 꽤 최근까지도 구멍가게와 전통시장을 드나들 수밖에 없던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 그 공간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이 흐르는 곳이었다. 흥정을 위한 가벼운 실랑이나 돈이 부족한 학생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가격을 깎아주는 일도 종종 일어났으며, 동네 노인의 사랑방 역할도 해냈다. 구식 가게들이 편의점으로 변모하며 돈이 되지 않을 비합리적인 시스템도 퇴출되는 과정을 겪었다. 편의점이 우리 삶 속에 한 부분 그 이상으로 스며들면서 우리도 자본주의적인 삶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아니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가는 것만 같던 내 고향에도 편의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파트 한 단지도 안 될 인구, 그리고 그 대부분이 노인인 이 촌구석에 편의점이 들어온 것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친구네 할머니가 아주 예전부터 하시던 덕천슈퍼(이름은 슈퍼지만, 구멍가게에 더 가깝다.)가 내가 중학생일 때 쯤 새로 생긴 대박마트(역시 이름은 마트지만, 슈퍼라고 하는 게 더 납득 가는 규모다.)에 대응하기 위해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덕천슈퍼를 위협하던 대박마트도 몇 해 지나지 않아 타 브랜드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동네 이름을 본 딴 따뜻한 구멍가게도, 개성 넘치는 이름의 슈퍼도 결국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가 됐다. 두 가게의 혈투의 끝이 프랜차이즈라는 것은 조금 씁쓸한 일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 <현수동 빵집 삼국지>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프랜차이즈 빵집 두 집과 동네 빵집 하나는 경쟁을 하지만, 승리하는 빵집은 저 세 곳이 아닌 기업이었다.”


  브랜드는 사람들의 기호를 획일화시키고 창의성을 저하시키는 단점이 있다. 개발과 발전은 오로지 자본의 몫일뿐이며, 나 같은 소비자나 을의 자리에 있는 점주들은 받아들이는 일만 하면 된다. 사회를 딱딱하게 만드는 한 축을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편의점이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자본의 아쉬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 읽은 흥미로운 부분인데, 촛불혁명 당시 편의점이 특수를 누린 것이다. 우산, 우비, 종이컵, 음료 등 집회 때 필요한 물건을 살 곳이 편의점이니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촛불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편의점이 만끽한 특수는 달갑지 않다.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거대 자본과 자본주의 사회에 항의하기 위해 우리는 모였다. 이를 위해 거대 자본 프랜차이즈인 편의점을 가게 되는 이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편의점의 확산이 꺼림칙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편의점에서 파는 식품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음식들이다. 백반부터 파스타까지 각종 음식들을 간소화 해 두었다. 행복도를 올려주는 부분에서 음식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음식을 먹는 즐거움 자체도 크지만, 식사할 때 사람들과 어울리며 얻는 재미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편의점에서의 식사는 그런 질적인 부분은 최대한 압축시키고 있다. 공적인 영역의 일부 역시 편의점이 담당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질은 진정한 질 보다는 속도와 양에 맞춰가고 있다.


  편의점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 책을 통해 편의점의 숨겨진 뒷면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나는 편의점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편의점은‘편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같지만,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문제의 핵심과 결합하며 삶을 더 푸석하게 만든 주범이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치닫기 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에는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편의’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본주의 체제에 덜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 비효율의 불편함에서 인간적임을 느끼고, 브랜드에서 기호와 상징을 찾기보다는 그 본질을 기억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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