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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Jul 07. 2024

지금 당신이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주 노예 Joe" 지금은 Joe튜브로 활동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실존적인 사람이고, 유머있는 사람이다. 실존적이며 유머있는 사람은 '현명하게 보인다.' 아니 현명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호주에서 워홀로 일을 하면서 사장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no money no honey" 어떻게 이런 라임까지 맞아 떨어지는 실존적으로 완벽한 문장이 있을 수 있지?


또 그는 이런 말을 한다. SNS로 여행과 사치를 '추억'이라며 기념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너의 오늘은 어제 먹은 밥이다. 추억이 아니라." 감동적인 문장이다.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서 바로 위의 문장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너의 오늘은 어제 먹은 밥이다. 추억이 아니라."

희망, 로고테라피, "오직 희망만이 오늘을 내일로 만들 수 있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 먹은 밥이 만든다.


유튜버는 추억과만 비교했지만, 나는 희망을 비롯한 모든 것에 비교하고 싶다. 결국 실존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제 먹은 밥이 오늘을 있게 해준다. 그러니까 하루하루만 살아간다고 생각해도 살아가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로고테라피, 희망

누군가 그랬다. 희망만이 오늘을 내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살하는 청년들을 보며 말했다. 인간은 밥먹고 배부르기만 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고.


빅토르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 "희망?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황이 나아진 후에 무언가 해야하는 것이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물론 언젠가 이 상황이 끝날 거라는 낙천적인 마음이 있는 거지만.


하지만 희망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살아 있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삶이라는 긴 여정 위에 잠시 고난의 계절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말이다.



어제 먹는 밥과 오늘 먹을 밥 그리고 희망

희망이니 로고테라피니 뭐니 해도, 일단 오늘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야 한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몇날 몇 개월을 굶듯이 먹고 살아야 할 수도 있지만, 어쨋든 살아있는게 희망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우울증에 걸렸을때도, 날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든 건 희망이 아니라. 그냥 그당시에 목구멍으로 넘긴 밥이었다.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밥이 아니라. 희망이었지만, 희망이 없고 정말 죽고 싶은 상황에서도 밥심으로 버틸 수 있다.



자아, 이름

오히려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당신의 자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자의식 과잉 때문이다.


자아, 이름이 없어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타인과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 잘 불리지 않는다. 그래도 현대 문명의 사람이라면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자기가 특별해야 한다는 착각이 인간을 좀먹는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는 것도, 당신을 오늘 살아있게 하는 것도 전부 실존적인 것이다. 그것들에 이름은 없어도 된다. 이름은 이미 있는 것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일 뿐.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그저 실존하는 몸과 실존하는 먹거리들 뿐이다.


당신을 사회에서 당신의 '자아와 이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는 인간이 사회에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을 '희망'이라기 보다, 보다 실존적인 것에 근거한 욕망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다음 글에서 말할 "스트레스 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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