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에 관한 단상

사람으로 사는 사회

by 포레스임

나이 오십이 되니 공부가 필요했다. 그동안의 나는 수동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왔다. 나를 채워야 한다는 절박함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하고 싶던, 국어국문학을 방송대에서 4년을 마치니 뭔가 아쉬웠다. 경쟁률이 걱정됐으나, 나름 학점은 자신이 있기에 지원하였다.


사회복지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2년 동안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피상적인 현실과 이론을 익히고 관련 자격 1급을 취득했다. 무엇보다 괜찮았던 점은 관련 직종인 사회복지사로 종사하는 학우들이 꽤 있었다.


수업 시 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 사회 사회복지 종사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적은 수입과 번 아웃(소진), 과중한 업무, 대인 면담의 어려움 등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뭔가 잘못짚었다 싶었다. 나이를 먹고 할 만한 일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했다. 과연 나는 이 직업을 할만한 적성이었던가. 누구를 위한 사명감이 과연 있었나?


결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연속된 직업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나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회복지의 텍스트 격인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다시 복기하듯이 봤다. 그리고 심호흡을 해봤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일부)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공습에 지하 벙커에서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여 종전 후, 비버리지 보고서를 필두로 애틀리 정부를 내세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기치로 사회복지의 전형적인 국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한계를 절감하고 마거릿 대처 정부 출범 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영국과 궤를 같이하는 미국은 자선에 의한 사회복지를 고수, 우리 사회도 그 노선을 추종하여, 자조와 자립의 정신을 부르짖어왔다. 하지만 출발선이 다른 소외된 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주는 대로 먹는 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라는 호칭이 아닌 사람들을 내가 직면할 수 있을까. 그들을 대변하고, 부대끼며 같이 울어줄 수 있는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넘쳐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다시 자본주의 초기 기괴한 모습으로 올리버들을 양산할지도 모른다. 하필 지금의 정부가 그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시 힘에 의한 국제질서로, 야만의 시간이 예고된 느낌은 나만이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런 때일수록 사회구성원들의 믿음과 질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미 파편화된 개인들이 이런 시기를 어떻게 넘길지 우려된다.


진영논리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는 생각이다. 바로잡아 줄 언론도 오히려 편승하여 더 부추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온라인 시대로 접어든 지 이미 오래인 사회 현상에서, 나부터 다른 이들의 생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나에게 맞는 콘텐츠만을 찾다 보니, 서로 간에 이해의 폭이 너무 벌어져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이것이었다


서로를 모른다는 것, 이해의 다리가 끊어져 있다는 것, 이것은 내 주변을 넘어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현상이다. 지난 시기에 우리 사회는 나름의 사회적 복지를 증진해 왔다. 제도적이고 보편적인 복지의 증진은 과연 꿈으로 그칠 것인가.


어느덧 경제 파이를 키워 자선과 선별적인 복지로 회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런 복지는 필연적으로 낙인 감을 양산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의 마지막 대사는 영국 사회복지의 선별적 회귀 현상에 경종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시민으로서 개인은 존엄한 존재다. 사회를 말없이 이만큼 곁부축하여 키워온 장본인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지레짐작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느 직종의 일보다, 가장 힘들다는 교훈은 젊어서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퇴직한 선배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근무 중 틈틈이 이발 봉사로 자신의 시간을 값지게 채워 나가셨다. 표정은 늘 온화했고, 누구를 대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독거노인분이나 경로당 등을 찾아가 기꺼운 마음으로 머리를 다듬어 주시고, 어떠한 사례도 받지 않으셨다. 월요일 점심시간에, 지난 주말 동안 이발해 주고 다닌 곳의 노인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거창하게 우리 사회의 복지에 관해 논할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소외된 이웃부터 챙겨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미소로써 다가서야 자격이 있다는 진실을 보았다. 그 선배분은 지금 어느 곳에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실 것이다. 나 또한 너무 꺼리는 마음을 버리고 다가서는 데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보리라 다짐한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나부터 재발견해서 무엇을 할지 찾아봐야겠다.

keyword
이전 02화웃-픈 순살 아파트 공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