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문인화의 경우 시와 그림이 하나이다. 또한 시의 경우 많은 시가 형상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경관이나 그러한 자연의 경관이 자신의 심상에 느껴지는 부분을 묘사하는 경우 시는 이미지로써 떠올려지고, 형상예술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문자를 쓰고 읽고 말하는 행위는 이미지 연상작용을 내포하는 일이다. 우리가 ‘안녕’이라는 문자를 읽었을 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의미로 ‘안녕’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안녕’이라는 두 글자에 헤어지던 마지막 연인의 눈빛을 생각하는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문자는 독립된 기호로써 인류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완전히 독립된 운명을 지닌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글을 배울 때 전래동화나 그림책을 통해 글을 익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림책은 풍부한 이미지로 문자를 익히게 하며, 문자를 익히기 쉽게 단어카드에 그림을 꼭 끼워 넣는 것은 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문자를 배우게 하는 방법이 된다. 이처럼 문자와 이미지는 서로가 떨어져 있지만 필요에 의해서 함께 하기도 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광범위한 이미지를 문자로 옮겨 표현하기도 하지만, 간단한 부호로 이미지가 문자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문자 대신 모바일 메신저의 이모티콘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문자와 이미지의 분리 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의 시·서·화의 일치와 문인적 행위를 반격하는 작품은 박이소의 <그냥 풀>을 들 수 있다. 박이소의 <그냥 풀>은 옛 선비가 난을 치는 행위를 통해 정신적인 소양과 덕목을 기를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을 ‘그냥 풀’이라는 문자로 전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이소의 <그냥 풀>은 조선의 화가 조희룡이 짧은 문체로 제화를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조희룡의 제화는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그림에 대한 사실적 묘사나 감상보다는 문학예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명제에 더 골몰한다.1) 박이소는 난(蘭)그림을 가지고 고매한 정신적 행위와 결부 짖는 전통을 전복하지만, 그 또한 철학적 명제를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희룡이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제화에 독창성을 띄는 것처럼 박이소 역시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 독창성을 띄는 것이다. 게다가 조희룡의 문체는 짧은 소품체로, 소품체는 노스님의 화두 같은 특성을 지닌다.2) 박이소의 <그냥 풀> 역시 전통의 무비판적인 답습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 것과 같다.
박이소 외에 문자를 통해 전통을 변용한 동시대 작가는 손동현이 있다. 손동현의 문자와 전통을 활용한 작업은 문자도를 통해서이다. 민화에서 문자도는 문자가 교육의 기능에 활용된 대표적인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효(孝),제(弟),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로 구성되 있는 문자도는 유교사회에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 백성에게도 유교의 이념은 널리 퍼져있었다. 문자도는 유교 덕목을 가리키는 한자에 새, 물고기, 꽃 등의 형상이 함께 표현된 그림문자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문자도에는 고사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효(孝)에는 왕상의 고사, 의(義)에는 ‘도원결의’의 고사가 그려져 있다. 손동현의 문자도를 보면 코카콜라, 아디다스, 스타벅스 등 상업로고를 문자도로 변용한다. 현대인이 자주 접하는 상업적인 브랜드와 결합하는 것이다. 사실, 상업로고 역시 문자를 디자인의 영역으로 가장 잘 활용한 예이다. 여러 상업브랜드의 이미지는 로고의 간단한 마크나 문자로 기억되곤 한다. 손동현은 전통을 변용할 때 현대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고심한 것 같다. 문자도 뿐만 아니라 손동현의 초상화 작업 역시 대중에게 익숙한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시각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리 삶 속에 익숙한 것을 결합하여 친근함을 느끼게 하며 동시대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측면에서 제주도문자도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을 기록하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전통에서 문자도는 특히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문자도는 유교적 실천을 이미지로 독려하는 매개체였다. 동시대미술에서 문자도는 이러한 본래에 목적에서부터 다소 벗어나 현대인의 소망, 윤리, 여가 등과 결합하고 있다.
1) 이성혜, <매화에 미친 문인화가의 일생 - 조선의 화가 조희룡>, 한길아트, 2005, p.185. 참조.
2) 앞의 책, p. 18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