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혹시 기억하세요? 205동 1004호인데요. 예전에 여기서 전세 계약을 했거든요. 전세 만기가 다 되어서 재계약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며 약간은 주눅 든 모습으로 질문을 하는 주연 씨를 보고, 나는 특유의 높은 텐션으로 그녀를 반겼다.
"기억하다마다요. 잘 지내셨죠? 맞다 맞다 맞다! 전세 만기 다 되어 가겠네요. 집주인하고는 통화해 보셨어요? 전세가격 많이 내렸는데 깎아달라 해보셨어요? 집주인이 나가라 그러던가요? 요즘 분위기가 집주인이 나가라 마라할 그럴 처지 아닌데."
"아아.. 집주인과 통화해야 되는 건가요?"
"어~어... 어. 네... "
너무나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것에 나는 순간 조금 당황했다.
"집주인하고 일단 통화를 하셔야 하구요. 어어... 전세가격이 내렸으니 깎아달라는 이야기도 해 보시구요...그리고 전세자금 대출받은 은행에도 한 번 통화하셔야 되고..."
"아, 전세금을 깎아 달라고 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의 표정이 환해진다.
친정어머니와 집을 구하러 왔던 주연 씨는 남편도 없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오랜 시간 작은 식당을 했던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이제 몸이 안 좋아서 장사는 못하고 밤늦게 까지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딸의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같이 살기로 했다며 아파트 전세를 구하러 왔었다.
전혀 자신을 돌보지 않는 듯한 체형과 화장기 없는 얼굴 손질되지 않은 짧은 머리... 그리고 무척이나 고단해 보이는 표정.
주연 씨의 얼굴은 아이들과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옛날 우리네 부모님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도,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한 기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똑 닮은 그녀의 친정엄마는 장사를 그만두고 딸과 손주들과 살게 된 것이 무척 행복한 것 같다.
손주들 이야기를 할 때 얼굴을 뒤덮는 밝고 환한 미소가 나까지 웃게 만든다.
이 분들이 무척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장님. 이 번에 우리 마누라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어요. 부동산 할 만한 자리 없어요?
소장님이 하고 있는 이 자리도 괜찮고, 하하하. 소장님 혹시 일 그만두고 사무실 넘길 생각은 없나요?"
주연 씨가 전세계약을 하고 입주를 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주연씨네 집의 임대인 부부가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하하. 아직 제가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고, 부동산 할 만한 좋은 자리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몇 달 후 주연씨네 집주인은 옆 동네 어딘가에 부동산을 열었다며 연락을 해왔었다.
"소장님. 전세 만기 다 되어간다고 임차인이 찾아왔던데 혹시 소장님께 전화하셨던가요?"
이젠 임대인에게 사모님이란 호칭은 쓰지 않는다.
"아, 안 그래도 어제 전화 왔어요. 재계약하고 싶다기에 기존 보증금에서 5천만 원 낮춰서 재계약하기로 했어요"
"5천만 원이나 깎아주셨어요? 전세가가 많이 내리긴 했지만 임대인들이 그렇게 많이 깎아주는 경우가 드문데.
소장님 복 많이 받으시려고 그랬구나. 소장님 왕 멋짐. 계약서는 작성해 둘게요. 편하실 때 오셔서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요."
좋은 집주인이다. 아무리 전세시세가 내렸다고 해서 그렇게 목까지 차도록 보증금을 깎아주는 경우는 잘 없다. 기존 임차인이 새로 집을 구할 때 들어가는 이사비, 중개수수료, 주변 아파트 시세 등을 고려하면 최대한 적게 깎아줘도 임차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연 씨가 새 계약서를 찾으러 왔다.
급하게 나온 듯, 머리카락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는 것 같다.
주연 씨는 늘 고단해 보인다. 그리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말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에 불만 갖지 않고 씩씩하게 착하게 살고 있다고.
"감사합니다. 얼마인가요?"
주연 씨는 계약서 작성을 해 주었으니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돈 안 주셔도 돼요. 지난번에 우리가 진행했던 계약이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한없이 착한 미소를 짓고 돌아서 나가는 주연 씨를 보면서 다시 한 번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고 유명하고 부유하고 위대하고 다른 이로부터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삶.
그런 삶을 살아야만 제대로 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힘든 일을 하면서도 묵묵히 살아내며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소명일 수 있으나 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내 아이들을 보호하며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그런, 대다수의 삶도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하고 추앙받아야 하는 삶. 아닐까.
특별할 필요도 반짝일 필요도 없다.
그렇게 묵묵히 성실히 살아내는 삶의 끝은 절대 공허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가난도 습관이다.라는 책임감 없고 경박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 , '알았어 알았어. 그건 네 생각이니 그 말 잘 접어서 네 주머니에 넣어둬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