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서른 살이 되었으려나. 나이는 어리지만 속도 깊고, 돈 앞에서 물불 안 가리는 욕심쟁이 소장님들 틈에서 자신만의 의리와 원칙이 있는 멋진 MZ 소장님이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장님이다.
"있지. 탑층 하나 있어."
"아. 탑층은 안 돼요. 손님이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응. 보고 이야기해.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할 거라 확신하는 집임!"
"아, 그래요? 그럼 모시고 올라갈게요. 하하"
아가씨 소장님은 두 명의 중년의 여인을 모시고 집을 보러 왔다.
한 분은 강한 인상에 아파트 입대위 회장을 해도 아깝지 않을 포스를 지녔고, 한 분은 코스코스처럼 여리여리 하다.
"탑층이지만 조망도 안정감이 있고, 무엇보다 새 집보다 깨끗하다 할 정도로 관리가 잘 된 집이랍니다."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매우 친근한 말투로 설명을 하며 집으로 들어선다.
"어머!! 언니. 나 이 집 마음에 들어."
집을 둘러본 사모님 한 분이 상기된 얼굴로 마음을 숨김없이 이야기한다. 집이 마음에 들어도 협상에 있어 불리한 포지션이 될 까봐 웬만한 사람들은 티를 내지 않는데... 이분. 무척 순수하신 분이구나!
손님을 모시고 내려간 아가씨 소장님이 두 분과 한참의 회의 끝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
"소장님. 가격을 좀 깎아봐 주시구요. 저... 잔금일은 두 달 이상 지난 후에 가능한데 괜찮을 끼요? 그리고 계약금이 오백만 원 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시면 오늘 오 백만 원 다 입금하신대요"
"매매자금 대출 안 받으신대? 계약금을 매수금액의 5%는 걸어야 대출이 될 텐데? 매수인이 대출 안 받으셔도 되면 계약금은 오백만 원도 상관없어. 집주인이 여유가 있는 분이시라. 그리고 잔금일도 늦어도 상관없고..."
우리 단지에서 가장 깨끗한 집을 가장 저렴하게 내어 놓으셨던 집주인은 처음 가격보다 150만 원을 더 깎아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오신 김에 계약서 쓰고 가시라 그래. 멀리서 오신 것 같던데"
"아 그럴까요? 그럼 손님 모시고 금방 갈게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되었다. 몹시 기분이 좋다. 이런 보리숭년에 집을 팔다니. 그것도 바로 당일 계약서까지 쓰고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든다.
두 중년의 여인들의 관계는 친자매라고 했다. 포스 넘치는 여인은 7남매 중 둘째이고, 코스모스처럼 여리한 여인은 막내라고 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막내 동생은 언니를 엄마처럼 의지하고 따르는 것 같았다. 언니 역시 동생을 너무나 걱정하고 챙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무릇 자매란 저렇게 서로 챙기고 아껴주고 하는 것이지. 좋겠다. 우리 집 남매들은 다들 멀리 살아서 명절에도 얼굴 보기 힘든데... 부럽군!
딱 보기에도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막내 동생은 처음 보는 공인중개사와 매도인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친정도 시댁도 모두 부자였다는 그녀는 평생을 예쁘게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는데 1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로 홀로 아들을 키웠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이후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땐 눈이 빨개져선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아들 잘 키우셨잖아요. 대단하고 장해요. 우리 동네 이사 오시면 좋은 일 많이 생기고 마음도 편할 거예요. 동네가 터가 좋대요. 하하"
분위기를 바꾸려 던지는 나의 말에 금세 미소를 짓는 여인은... 울다가 웃다가... 역시 순수해 보인다.
계약은 무척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고, 두 중년의 여인과 아가씨 소장님. 매도인은 사무실을 떠났다.
그렇게 바쁜 아침 시간을 보내고 식사 후 식곤증과 사투를 벌이려 하는데 전화가 온다.
아가씨 소장님이다.
느낌 안 좋다.
"소장님. 어떡해요... 방금 계약하고 가신 분한테 전화가 왔는데요. 하아...
계약을 취소해 달래요."
"응? 왜? 갑자기? 계약금 넣고 도장까지 다 찍고 했는데 왜?"
"그 사모님의 아들이 이번에 취직을 했는데 회사가 우리 동네에 있는 회사래요. 그래서 여기에 집을 구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은 근무를 여기서 하는 게 아니래요. 우리 동네에서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동네에서 근무를 하는 거래요. 그걸 이제 알았다고 계약금을 돌려 달라고 하셔요. 집주인이 돌려주실까요? 안 되겠죠?"
"글쎄... 일단 집주인에게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집주인이 못주겠다고 해도 할 말은 없으니... 큰일이네"
"소장님. 말씀 좀 잘 드려 주세요. 매수 사모님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절반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게... 부탁 좀 드려요."
어쩐지... 계약이 참으로 순조롭다했지.
집 하나 보여주고 당일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지는 계약이라 아름답다 하였거늘... 젠장.
김이 팍 새버린 나는 그렇다 치고, 매도인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된다.
어렵게 전화를 건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소장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며 나에게 되묻는 매도인 사모님.
사모님도 처음 겪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하신 듯하다.
"일단... 계약금을 돌려주고 말고는 사모님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다만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매수인 사정이 딱한 것 같던데 한 3백만 원 정도는 돌려주시는 게 어떨까요?"
"알았어요. 오늘 밤에 남편 오면 상의해서 내일 오전에 보낼게요."
그렇게 후다닥 진행되었던 계약은 휘리릭 파투가 났다.
다음날 아침.
매도인 사모님이 아침 일찍 전화를 하셨다.
"소장님. 남편이랑 상의해 봤는데, 남편이 이런 경우가 없다면서 3백만 원까지는 못 돌려주겠다고 하는데요. 한 2백만 원 돌려주면 안 되겠어요?"
......
사람 좋은 사모님도 밤새 생각해 보니 계약금을 절반이상 돌려주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셨나 보다.
예전에 경기도에서 내려온 어르신의 계약금 천 오백만 원을 (아무리 사정을 해도) 통째로 삼켰던 젊은 아낙을 생각하면 사모님은 양반에 속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그런데 제가 사모님께 수수료 달란 이야기 안 했잖아요. 원래 매도인이 계약금을 손해배상 금액으로 가지게 되면 세금도 내셔야 하고 저희 법정 수수료까지 다 주셔야 하거든요. 그렇게 이리저리 돈이 나가면 결국 손에 남는 것도 없을 거예요. 사모님도 어제 보셨겠지만 딱한 사정을 가진 분이시고, 이 집을 사게 되면 남편도 없는데 아들마저 떨어져서 살아야 되고... 안타깝잖아요. 그냥 3백만 원 돌려줍시다."
다행이다. 마음 약한 매도 사모님은 금방 설득이 되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고생은 소장님 하셨는데 빈손이어서 우째요. 다음에 부동산에 맛있는 거 사갈게요. 돈은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솔직히 나도 계약해제로, 벌었어야 할 중개수수료를 벌지 못한 것은 속이 아린다. 길 가다 지갑을 서리당한 기분이랄까.... 당연히 요구해도 될 법정수수료를 달라고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나는 멍충이인가? 바보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든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매도인에게 수수료를 요구하면 그 돈 역시 그 미망인에게서 나와야 하는 돈이겠지. 힘든 사람의 돈을 굳이 나까지 엎어서 뜯어갈 이유 없지 않은가.
순간의 판단 실수로 몇 백을 날려야 하는 매수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에게 들어올 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매도 사모님도 그냥 다 돌려주셨으면 참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MBC 실화탐사대에서 본 이야기이다. 제목이 실화탐사대이니 허구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말 그대로 실화이겠지.
P 씨는 남편 없이 두 딸을 키우며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고 한다.
일하는 식당에 손님으로 왔던 H 씨와 연분이 싹터서 두 사람은 결혼식은 올리지 않고 동거를 10년 넘게 하고 있는, 그러니까 사실혼 관계였다.
P씨가 H 씨를 만나서 살림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영험한 꿈을 하나 꾸게 된다.
돌아가신 P 씨의 친정어머니가 밝은 얼굴로 나타나 '고생 많았다. 이제 행복하게 살아라...' 하며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꿈.
꿈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P 씨는 동거남 H 씨를 시켜 로또 두 장을 사 오라고 시킨다.
역시, 예사롭지 않았던 꿈은 로또 1등이라는 행운을 P씨에게 안겨주었다.
로또 당첨금 13억을 수령한 P씨는 그 돈으로 원룸이 16개나 있는 다가구 주택을 매입하게 되었고, 그 주택 역시 몇 년 후 상당한 차액을 남기고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조상의 은덕으로 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P씨는 갑작스러운 심장질환으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녀가 숨을 거둘 당시 4억 상당의 빌라 한 채와, 8억 5천만 원 정도의 현금이 남아있었다.
P씨가 죽은 후, 사실혼 관계였던 H 씨와 P씨의 자녀인 두 딸이 유산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동거남 H씨는 당첨되었던 로또를 자신의 돈으로 구매하였으며, 수령인 또한 자신이었지만 P씨에게 모두 맡겨두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P씨의 막내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부터 며칠 동안 어머니 계좌에 있는 모든 돈을 자신의 계좌로 모두 옮겼다.
한 때는 아버지라 부르며 살갑게 지냈던 P씨의 두 딸은 H씨를 더 이상 가족으로 보지 않았고, H씨 역시 유산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변호사를 선임하여 두 딸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의 계좌에 있던 8억 5천만 원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허공으로 사라지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돈을 가져간 막내딸은 매일 술을 먹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는 BJ들에게 신나게 별풍선을 쏘며 후원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아주 짧은 시간에 남김없이 흔적 없이 다 써버렸다.
아참 4억짜리 빌라 한 채 남았지.
하지만 그 빌라 역시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산에 대한 상속세를 내야 하는데, 무신고 가산세까지 더하면 상속세가 최소 3억에서 4억 일거라는 세무사의 살뜰한 설명도 방송에 함께 나왔다.
주인을 잃은 돈은 새 주인을 인정할 수 없어서 알아서 흩어져 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깔끔하게 완벽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 딸도, 동거남 아저씨도 돈의 주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에도 눈이 있고 발이 달려 있다는 말. 돈은 인격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사랑하되 돈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되며, 큰돈이 들어와도 그 돈을 품을 그릇이 안되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돈은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릇 크기도 모른 채, 어쩌면 자신을 섬기지 않을 돈을 무리하며, 때론 자신을. 남을 해쳐가며 가지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순리를 거스르고 억지로 품은 돈은, 때로는 주인을 찌르고 나락으로 보내버리기도 한다.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나에게 들어올 돈은 들어오게 되어있고. 아무리 용을 써도 내 것이 아닌 것은 손에 쥘 수도 없으며 억지로 손에 쥐었다 해도 빠져나간다.
그러니 항상 돈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돈이 잘 쓰일 수 있도록 편안하게 대하며 돈이 나를 어색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도록 해야겠다.
때론 예기치 못한 일로. 혹은 나의 실수나 무지함으로 돈을 잃는 일도 있겠지만 너무 연연할 필요도 없다. 결국 돈은 자신을 잘 써줄 사람을 위해 움직이고 모일테니까.
돈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의 그릇을 키우다 보면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 돈은 끌려온다는 진실을 믿어보기로 한다. 내것 아닌것에 대한 욕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