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쓰다

by 키키 리리

우울한 마음을 글로 쓴다는 건


마음이 우울한 상황에서 쓰는 글은 남들이 보기에 유치하고 신세한탄 같아서 본인 스스로 잘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우엔 이런 글이 남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서 처음엔 쓰지 않으려고 했다.


아래 글을 읽어보자. 2021년 8월에 쓴 글이다.


어젯밤 자려고 누웠는데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엎드린 채 눈을 뜨니 베개 줄무늬가 실뱀처럼 구불구불 흘러갔다. 양 옆에서 잠든 어린 자식들은 어미의 팔과 손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삶이 형벌 같았다. 곱게 포장해서 이야기이지 늘 부탁하고 요청하고 명령한다.

원격 수업을 하느라 화면 너머 학생들을 만난다. 이게 뭘까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누가 대답해볼래요? 화면 켜 주세요. 열이면 열 대답이 없다. 내 목소리가 잘 익은 사과처럼 땅에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화되자마자 얼어버린 입김처럼 땅바닥에 아무렇게 흩어졌다.

어린 자식 둘에게 늘 잔소리를 한다. 그네들이 내 말을 안 듣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아픈 어미의 마음이 너무나 좁다.

몇 달 전, 소설 <환상의 빛>을 읽은 이후로 늘 내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도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살기 싫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죽고 싶진 않지만 사라지고 싶었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버겁다. 항상 벼랑 끝에서 사는 기분.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가끔 벼랑 끝에 서는 사람과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의 삶은 당연히 다르지.

태풍 때문에 한밤중에 깬 첫째가 무섭다고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비스듬히 세워서 첫째의 가슴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옆에 있어, 괜찮아. 괜찮아. 눈 감으면 잠이 올 거야. 괜찮아.

한참을 두드려주니 이불을 둘둘 감은 채 곤히 잠들었다. 어미의 말을 듣고 안전지대로 이동한 첫째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로 누워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젠 내가 안전지대로 옮겨갈 차례였지만 이불을 가랑이 사이에 낀 채 벼랑 끝에 누웠다. 그리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멀리서 봐도 우울증 환자의 일기라고 생각된다. 기운이 없어 축 늘어져서 물레에서 실을 뽑아내듯 우울을 뽑아내서 글로 직조했다. 이 일기 속의 나는 학교 일과 가사, 육아에 지친 모습이다. 이 글을 쓸 때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했다. 말할 의욕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썼다. 왜냐하면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어떻게든 설명이 안 된다. 단순히 자기표현의 욕구라고 퉁칠 수도 없다. 우울한 내면을 한 자 한 자 글로 되살리면서 그 시간을 다시 한번 살았고, 다시 한번 살 수 있어서 나 자신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다.


안전지대 없이 벼랑 끝에서 사는 삶이란 무척 위태롭고 아찔하다. 차마 죽고 싶다고 말할 수 없어서 사라지고 싶다고 말했다. 우울이 나를 어떻게 침몰시키는지 천천히 썼다. 직면이다. 나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포장하거나 못난 보인다고 회피하지 않고 느끼는 그대로 썼다. 쓰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느꼈다.


흔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흔한 말이 나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말이었다.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누구더라? 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라? 난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더라? 이런 내용이 머릿속에 없다면 껍데기만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울한 내면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비로소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우울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우울에 대해서 쓸 수 있으면 더 이상 우울이 두렵지 않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두려운 대상은 피하려고 한다. 내가 우울한 내면을 민낯 그대로 공개하고 밑바닥을 드러냈다고 해서 우울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울을 두렵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마음이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효과를 얻었다. 얽히고설킨 마음을 글로 풀어내면서 자기표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글쓰기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용기를 더 얻을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글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죽음 앞에 내 새끼들이 먹을 김밥을 열심히 마는 내 모습과 그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장면까지. 어쩌면 가감 없이 살려낸 모습을 통해 나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누군가의 부음을 들었다. 우울증과 응급실이라는 단어가 남편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그 사람을 꽤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우울증 환자는 혼자 두면 안 된다니까! 나는 안타까워서 남편에게 소리쳤다. 왜 입원 안 시켰어? 약은 안 챙겨 먹었대? 나는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을 하면서 우리 집 아이들에게 먹일 김밥을 열심히 말았다. 제비 새끼처럼 입을 쫙쫙 벌리며 엄마가 주는 김밥을 받아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누군가의 죽음이 주는 슬픔에 잠기기보다는 내 새끼들이 김밥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며 즐거워하는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다.'라는 거창한 말 따윈 하지 않아도 그렇게 산 자의 삶이 굴러간다는 사실 쯤은 알만한 나이였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김밥이라는 단어를 끼얹으며 몇 시간을 보낸 나는 다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슬픔이 치밀어 올라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더 이상 내 몸에 볼펜으로 긋지 않는다. 아주, 아주 극심히 우울이 치밀어 오를 때면 내 몸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때론 이 충동에 백기를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약은 잘 챙겨 먹으며 병원도 꼬박꼬박 다닌다. 나 잘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게 아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지만, 나는 내가 살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른 이의 죽음 앞에, 비겁하게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 난 그래도 살아있구나, 살아있기로 선택했구나, 이런 마음이 앞서서 기분이 이상하다.

나와 비교하지 않고, 나 잘하고 있다고 떠벌리지 않고, 그의 죽음을 오롯이 애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그날을 기다리는 게 허무맹랑한 믿음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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