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문학상 공모전 발표가 나고 학교 신문에 당선작 전문이 실리면서 슬은 과에서 유명세를 치렀다. 대상 없는 우수상이었지만 슬은 기쁜 마음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컸다. 그즈음 혜나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둘은 전람회의 그림에 앉아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혜나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한층 깊어진 눈동자는 매력적이었다.
“이슬.” 혜나가 나직이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난 항상 너를 ‘이슬’이라고 불렀어.”
“맞아. 성까지 붙여서.”
카페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슬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네가 버스에서 멋대로 내려버렸던 날 이후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혜나는 갑자기 지난 일을 끄집어냈다.
슬은 기운이 쑥 빠졌다. 혜나와 헤어진 후 자취를 시작했으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글쓰기에 매달렸다. 고모는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들르라고 부탁했지만 슬은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가끔 지호를 만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뿐 슬의 삶의 이전으로 돌아가 고독 속에 잠겼다.
혜나가 가방에서 학교 신문을 꺼냈다.
“이거 나지?”
슬은 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서 무슨 답을 기대하는 걸까?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내게 다시 연락했을까?
“맞아. 하지만 그뿐이야.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어.”
지호가 말했다. 소설은 결국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슬은 글에 한창 매달렸던 늦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혜나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어서 아예 소설 속으로 끌고 왔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쓰면서 그를 잊었는지도 모른다.
“혜나야.” 슬은 눈앞의 혜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다시 보자고 했니?”
슬은 그가 벗어둔 빨간색 코트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들어 카페 곳곳에 걸린 그림과 소품을 바라보았다. 장소는 변함이 없는데 그곳에 앉은 사람들은 늘 변한다. 자신의 곁에 앉아서 깔깔 웃고, 어깨에 기대어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혜나는 지금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이제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영영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이 엉망이었잖아.” 혜나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렇게 헤어질 수는 없지. 안 그래?”
“엉망진창. 맞지, 엉망진창이었지.”
슬은 희미하게 웃었고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너를 볼 수 없겠구나.”
혜나는 한 음절마다 힘겹게 말했다. 음절 사이마다 간격이 너무 커서 마치 영원이 들어앉은 듯 느껴졌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걷는 너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도 없을 거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걷지도 못하겠지.”
“혜나야.”
“카페에 앉아 책 읽는 너를 방해할 수도 없겠지.”
그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따랐을 거야.” 슬이 말했다.
“그 말이 되게 아프게 들린다.”
“미안해.”
혜나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가끔 볼 수 있을까?”
슬은 거절했다. 다시 고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매끄럽게 걸어가고 싶었다. 누군가로 인해 번민과 고뇌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부딪히고 깎이고 자라고 잘리는 삶을 이어가기 싫었다.
혜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슬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안녕.”이라고 말하면 영원히 슬을 잃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슬은 그게 혜나 나름의 이별 방식이라고 믿었다.
슬은 코트를 입고 문을 나서는 혜나를 눈길로 따라가면서 그의 앞길을 축복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