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13

by 키키 리리

슬은 ‘포크와 나이프’라는 경양식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학기 개강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울산에서 일하는 아빠가 등록금과 생활비를 넉넉하게 보내주지만 언제까지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고모가 “너도 이제 독립해야지.”라고 말한 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혜나가 다시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고 힘겨웠다. 다행히 일하느라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 혜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견딜 힘이 생겼다. 사람들 말이 맞았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몸을 바삐 움직여야 한다. 슬을 그 말에 매달려 더욱 바쁘게 살았다.


슬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시간이면 가을에 열리는 문학상 공모전에 낼 소설을 쓰기 위해 구상에 매달렸다. 지호는 공모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슬에게 알려주었고 그 역시 작품을 낼 거라고 귀띔했다. 지호는 그 일 이후로 슬에게 간간이 연락했다. 슬을 통해 혜나의 소식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슬 역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슬은 유리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려주며 넌지시 혜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유리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너희들의 일에 난 끼어들지 않겠어.”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끝내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는 못했다.


슬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혜나가 식당 앞으로 찾아왔다.


둘은 말없이 거리를 걷다가 정류장에서 77번 버스를 탔다. 버스 제일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는데 누구라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슬은 가방에서 시디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 한 쪽을 혜나에게 건넸다.


“뭐야?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혜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드디어 말하네.” 슬이 초연하게 말했지만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의 운명이 혜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혜나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슬의 내면에서 혜나에게 머물고 싶은 마음과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다퉜다. 자신을 기다림과 고통의 연속으로 밀어 넣은 그가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혜나가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 영영 그를 되찾을 기회 따윈 사라진다.


슬은 자신의 운명을 거머쥔 혜나가 어서 빨리 결판을 내주길 바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이슬.” 혜나가 슬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혜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다정한 사람의 이면을 보는 일은 괴롭다.


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가 네 이야길 했어.”


“그럴 것 같았어.”


“그리고 지호 이야기도.”


그러면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넌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일까? 슬은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할지 변명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난 널 떠날 거야.” 혜나가 선언을 했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혜나는 더이상 부연 설명을 달지 않았다.


고요가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슬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우리의 이야기도 결국 흔해 빠진 사랑 얘기에 불과할까? 윤상의 노래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슬은 혜나와 채팅을 할 때마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대화명 이슬♡과 이슬.


어쩌면 그 순간조차 혜나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혜나가 거리에서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거절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지호 일로 실망한 혜나가 집으로 돌아간 장면도 생각났다. 왜 이제야 이 모든 찰나가 상처가 되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슬은 안타까웠고 자신이 이별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혜나는 떠날 것이고, 자신은 남겨진 사람이 된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현실이었다. 슬은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을 자제하려고 애를 썼다. 왜냐고 묻고 싶은 말을 집어삼켰고, 떠나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혜나가 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널 떠날 거야.”


혜나는 또다시 입을 열었는데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


“뭘 아는데?” 혜나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네가 떠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슬은 화가 났다.


“네가 말해 준 적 있어?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런 넌 물어본 적은 있니?”


사이좋게 나눠 낀 이어폰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졌다. 슬은 이어폰 줄을 당겨 자신의 가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슬은 떠나는 버스 뒤꽁무니를 노려보았다. 혜나와의 마지막 작별이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혜나와 보낸 수년의 시간이, 연인으로 보낸 수개월의 시간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슬은 불이 환하게 켜진 가게 앞을 서둘러 걸었다.


집까지 한참 걸어야 한다.


어두워도 매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짝을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음식점 앞에 내어놓은 종량제 봉투는 까마귀들이 다 찢어놓아서 길바닥에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술집 앞에는 누군가가 토해놓은 토사물이 보였다. 슬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참고 길을 걸었다.


걸어야 할 길이 너무 많고 집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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