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은 현관문을 열었다. 고모가 불을 환히 켜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아, 이제 오니?” 고모가 다정하게 말했다. 초조해 보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미안해. 아까 말도 없이 나가서.”
슬은 방으로 들어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모가 앉아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모는 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전화 한 번 하지 않고 기다린 고모는 애가 얼마나 탔을까? 슬은 고모에게 미안했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 후 결혼도 안 한 자신의 누나에게 3살짜리 조카를 맡겼다. 졸지에 아이를 맡아 키우게 된 고모는 그때부터 조카에게 꼼짝없이 얽매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슬이 어느 정도 크자 전공을 살려 번역 아카데미를 수강 후 집에서 번역일을 했다.
만약 고모의 삶에서 자신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나 자유롭게 살았을까? 슬은 늘 고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지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고모는 나를 키우면서 힘든 적이 없었어? 고모가 결혼도 못하고 집에 눌러앉은 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해.” 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주아주 힘들었지.” 고모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듯 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도 말이야, 네가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눈칫밥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힘들어. 내 새끼는 내가 키우는 게 맞지.”
슬은 고모의 말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울어?”
“아냐, 안 울어.”
슬은 안 운다고 말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걸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고모, 있잖아.” 슬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 그 애랑 싸웠어. 그런데 내 연락을 안 받아.”
고모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어 가만히 슬의 등을 어루만졌다.
“불안하니?”
슬은 그 애가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렵다고 대답했다.
“네 불안은 당연해. 나라도 그런 상황이면 너처럼 행동했을 거야. 찾으러 다니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어, 어…….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걸 어떻게 알았어?”
“몇 번 봤어.”
슬은 고모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노릇이다.
“있잖아, 슬아. 어떤 일은 해결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 역시 너처럼 마음은 편치 않을 거야. 불안한 네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그리고 너는 그냥 평소처럼 네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불안이 조금 옅어질 거고 그때쯤이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 있겠지.”
“꼭 남 일처럼 말하네.” 슬은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결정은 언제나 네 몫이야. 알지?”
고모는 슬의 손을 꼭 잡아준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슬은 고모가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아껴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운 밤이었다.
거실에 혼자 남은 슬은 멍하니 베란다 밖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차가 지나가는 소리, 술에 취한 듯 혀가 꼬부라진 사람들의 말소리가 작게 들렸다. 불을 끄자 여름밤이 오롯이 느껴졌다.
슬은 더이상 혜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삶이란 결국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이상 정적인 삶은 어려웠다. 움직이고 부딪히고 깎이고 쌓인다. 슬은 자신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만큼 이미 맺은 관계가 흐트러지는 걸 근심으로 여겼다. 그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혜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면 계속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고모의 말대로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슬은 언제까지나 혜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다짐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혜나의 시간을 존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