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슬은 MSN 메신저를 켰다. 접속한 친구는 유리뿐이었다.
슬은 유리에게 대화를 걸었다. 혹시 오늘 혜나에게 연락이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안부인사만 주고받았다. 유리는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몹시 바쁜 모양이었다. 마수걸이도 안 했는데 옷을 환불하겠다는 사람, 옷걸이를 그냥 달라는 사람, 피팅 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옷을 훌렁훌렁 벗는 사람 등 그의 진상손님 이야기를 실컷 듣고 나니 한 시간이 흘렀다.
슬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유리야, 오늘 혜나에게 연락 왔었니?”
“아니. 둘이 무슨 일 있어?”
“좀 다퉜거든.”
“왜? 네가 뭐라고 했는데?” 유리가 채팅창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모티콘을 날렸다.
슬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게 싸운 일이 맞는지도 헷갈렸다. 지호가 한 말이 왜 그렇게 혜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슬은 몰랐다. 우리 둘 사이의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말. 그건 우리를 배려한 말이 아닐까?
그래서 슬은 기다렸다. 자신에게 커다란 물음을 남긴 혜나가 언제나 그렇듯이 웃으며 화해를 청할 때까지. 그는 못 이기는 척 져 줄 것이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나란히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혜나에게서 연락이 없다. 슬은 슬슬 불안했고 이 불안이 끝없이 이어질까 봐 더욱 불안했다.
슬은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유리는 답답했는지 슬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이 멍청아!”
유리가 씩씩댔다. 갑작스러운 그의 분노에 슬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고 유리에게 왜 화를 내냐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유리는 슬의 타박에도 전혀 굴하는 기색 없이 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말했지? 난 언제나 혜나 편이라고. 그렇지만 이건 객관적으로 말하는 거야. 이번 일은 네가 잘못했어. 아니, 지호도 잘못했어. 비밀을 지켜줄게. 그게 어떤 생각을 깔고 하는 말인지 정녕 몰라서 그래?”
슬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기 싫었다.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혜나를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다. 슬에게 혜나는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는 존재였다.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였고 거짓이 없는 존재였다. 이런 존재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신의 곁에 아닌 저 멀고 깊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리자 슬은 고통스러웠다. 고작 몇 시간이었다.
슬이 대답을 하지 않자 유리는 너와 혜나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밀을 지켜준다는 말이 어떤 생각의 바탕에서 나온 말인지 되물었다.
“그건 혜나와 나 사이를 존중한다는 뜻 아니야?”
“너희들이 무슨 죄를 지었니? 왜 너희 사이를 비밀에 부쳐야 해? 지호는 너희들의 사랑에 대해서 커다란 편견을 갖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고 알려지게 되면 당연히 욕을 먹는 관계라고. 너희의 성이 달랐다면 지호가 그런 말을 했을까? 축하한다고 말했겠지.”
“유리야.” 슬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호가 설령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난 그 애를 존중해. 우리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존중 좋아하시네. 배려가 아니라 편견을 드러낸 말이야. 그 앞에서 혜나가 뭐라고 해?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넌 정말 하나도 몰라. 혜나가 어떤 아이인지.”
슬은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의 마음이 서로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 역시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난 아무 잘못이 없다는 쪽. 어느 편을 선택하든 결론은 하나였다. 혜나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슬은 자신에 대한 반감 때문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이 혜나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만하라고 말했으며, 그저 국수나 먹으라고 재촉했다.
슬은 전화를 끊고 바로 혜나에게 연락을 했다. 혜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슬은 옷을 갈아입고 혜나가 사는 103동 앞으로 뛰어갔다.
혜나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슬은 자신이 오랫동안 혜나의 한 가지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끝없이 상기했다. 혜나가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모습, 그 모습 가운데 답이 있다고 여겼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고 하나의 얼굴만으로 살 수 없다. 연인이라면 무엇보다도 그 점을 알고 있어야 했다.
슬은 혜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같이 하교를 하면서 떠들어댔던 말들, 유리의 집에서 나눈 대화, 전람회의 그림에 앉아서 나눈 말들.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강물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과도 같아서 흘러가면 흐르는 대로, 흩어지면 흩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혜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봐 주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서 때론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슬은 혜나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고, 슬픔에 벅차올라 울고 싶었다.
혜나의 연락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혜나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슬은 자신의 잘못을 되짚어 보았다. 혜나가 토라졌을 때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혜나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혜나가 되었는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이든 당연했다. 혜나가 주는 사랑 앞에서 슬은 끝내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자신 만의 룰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안전하게만 가려던 그의 선택은 혜나에게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