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10

by 키키 리리

가게 안을 다시 들어왔을 때, 세 사람이 먹던 콩국수는 퉁퉁 불어서 국물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슬아.”


지호가 슬을 불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그를 불렀다.


“미안해.”


“왜 넌 아까부터 계속 미안하다고 하니?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야.”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왜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지. 아니다, 무슨 말이 소용 있겠어?” 슬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혜나에게 가보지 않아도 될까?”


“곧 화가 풀릴 거야.”


슬은 혜나의 마음이 자신보다 더 크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확신했다. 돌이켜보면 혜나는 언제나 슬의 곁에 있었다. 혜나는 슬이 혜나를 알기 전부터 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같이 우산을 쓰자고 말했으며, 항상 “슬”이라고 부르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슬이 책을 읽으면 옆에 앉아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같이 보폭을 맞춰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숨을 쉬는 아주 당연한 일상이었다.


모든 대상은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리고 그 존재가 제자리에 있을 때야말로 의미를 가진다. 혜나는 자신의 자리가 슬의 옆이라 믿었을 것이며 그를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 슬은 지호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늦은 오후, 버스 창밖으로 바라본 여름 풍경은 아름다웠다. 해는 높고,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나무들의 행렬이 시원하게 이어졌고,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마치 소풍을 가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슬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태양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돌연 자신이 외면했던 문제가 눈앞에 떠올랐다. 내가 틀렸으면 어떡하지? 슬은 언제나 고립을 즐겼다. 고요한 섬처럼 살고자 했으며 누군가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혜나가 나타나고 유리를 만나면서 달라지긴 했으나 그건 언제나 표면적인 변화였을 뿐이다. 자신의 본질은 바꿀 수도, 바뀔 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슬은 혜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고모는 슬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 그를 조용히 불렀다.


“무슨 일 있니? 도서관에 간다던 애가 책은 한 권도 안 빌리고 왔네.”


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모는 냉장고에서 수박을 잘라 슬에게 건넸다.


“좀 먹어봐.”


슬은 말없이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고모가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고모의 말을 듣는 내내 혜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정한 혜나의 얼굴은 늘 따뜻했다. 말할 때도, 울 때도, 킥킥거리며 웃을 때도 혜나의 표정은 하나였다. 슬은 문득 그가 혜나의 한 가지 표정만 알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아, 무슨 생각해?”


“별 거 아냐.” 슬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모는 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언제나 내 손 밖에 있었지.”


“무슨 소리야?”


“널 어릴 때부터 봤지만 한 번도 내 입안의 혀처럼 군 적이 없어.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뜻이지. 누굴 닮았는지 고집도 세고.” 고모가 살짝 웃었다.


“네가 대여섯 살 때쯤이었나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며 악을 쓰는데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 울음이 나오는지 마음이 너무 아팠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울지 않더라.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받아들이고 여겼지.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어떤 일에는 꽤 무심해지려고 노력하고. 근데 내 눈엔 보여. 그게 아니잖아? 안 그래?”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그러니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줄래?”


슬은 고모를 바로 보지 못하고 수박만 입에 밀어 넣었다.


“별일 아니야.”


슬은 의자에서 일어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벌렁 누워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해가 질 때까지 혜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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