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9

by 키키 리리

혜나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가봐야 해.”


“내가 점심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여기 콩국수가 끝내주거든.” 지호가 멋쩍게 웃었다.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니?”


“그렇게 맛있어? 그럼 친구랑 여기서 점심 먹어볼까?”


“내가 사준다니까.”


“괜찮아. 오늘은 친구랑 먹고 다음에 너랑 먹을게.”


슬은 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혜나야. 여기 후문 맛나 백반집인데……응, 거기 맞아. 올래?”


지호가 혜나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의 눈치를 살폈다. 슬이 전화를 끊자 영문과 김혜나인지 물었고 슬은 비로소 예전에 유리가 말한 지호가 눈앞에 서 있는 지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호가 자신도 합류할 수 있냐고 은근슬쩍 물었다. 슬은 서로가 아는 사이인데 굳이 피할 이유도, 만나지 못하게 막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혜나였다. 혜나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혜나가 나타났다. 검정 양산을 쓰고 빨간 원피스를 입은 혜나가 나타났을 때 지호는 귀까지 빨개졌다. 슬은 지호의 얼굴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자의 얼굴이라고 믿었다. 그 얼굴이 실연으로 상심할 거라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졌다.


지호의 맞은편에 슬과 혜나가 앉았다. 셋다 똑같이 콩국수를 시켰다. 음식이 나올 동안 혜나가 슬에게 물었다.


“둘이 어떻게 만난 거야?”


슬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지호를 만나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혜나는 슬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었다. 혜나는 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하였다. 깊은 유대감이 둘 사이를 지배하고 있었다.


점차 슬은 지호가 신경이 쓰였다. 자신들을 어떻게 볼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주위를 간과하기 쉽다. 마치 두 사람만 세상에 던져진 듯 행동하고 말을 한다.


지호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슬도 그것을 느꼈고 지호도 알았다.


지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둘이 마치 사귀는 사람 같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혜나가 대답했다.


“맞아.”


혜나가 미소를 지으며 슬을 바라봤을 때, 슬은 당혹감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혜나는 슬을 자신의 동맹군으로 여겼다. 어서 자신과 같은 대답을 해달라고 무언의 종용을 했다.


슬은 망설였다.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혜나가 상처받으리란 사실도 알았다. 슬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마침내 슬이 혜나와 같은 대답을 했을 때, 혜나는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슬을 보았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지호였다. 그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레즈비언 커플을 난생처음 만난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곧 침착해졌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아니 잘 배운 사람처럼 말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당황했지?”


지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하는 순간, 콩국수가 나왔다. 지호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슬과 혜나에게 건넸다.


“고마워.”


침묵이 흘렀다.


“비밀을 지킬게.” 지호가 엄숙하게 말했다.


혜나가 실소를 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당황한 지호가 혜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은, 너희들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곤란해질까 봐…….”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그건 우리 둘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야.”


혜나는 날이 잔뜩 서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슬은 혜나에게 슬그머니 화가 났다. 지호를 당황하게 한 것도 모자라 그를 타박하고 있다. 혜나 입장에서 지호는 불청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슬과의 만남에 예고 없이 끼어들었다. 슬 역시 혜나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혜나는 그 지점에서 화가 났고 슬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슬은 혜나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지호와 굳은 표정의 혜나를 보자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갈등은 좋지 않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이 풍랑을 만나 사방팔방 요동치고 있다.


슬은 주위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혜나가 부담스러웠다. 이전에도 그 문제 때문에 몇 번이나 스스로를 억눌러야 했다.


“혜나야, 그만해.”


슬은 조용히 타일렀다. 혜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슬.”


“이제 그만하고 국수 먹자, 응?”


혜나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받은 얼굴로, 오로지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에만 집중한 듯이 슬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슬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슬은 꼼짝없이 얼어붙은 채로 혜나를 지켜보았다.


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양산을 챙겨 가게 밖으로 나갔다.


놀란 슬이 혜나를 따라 밖으로 나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환한 8월의 햇살 아래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혜나의 뒷모습이었다. 늘 그러하듯 혜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울고 싶으면 울었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슬은 비로소 혜나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해야 했을까? 슬은 난처했다. 혜나가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싶어 할 때마다 슬은 거절했다. 슬은 혜나에게 자신을 맞추기 싫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각자 앞에 놓인 인생이 꼭 같은 방향으로 흘러갈 필요는 없었다. 슬은 그렇게 믿었고,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혜나는 울음을 그치고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슬은 혜나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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