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8

by 키키 리리

슬은 혜나가 과외를 끝낸 밤 10시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혜나가 선물로 준 윤상의 음악을 들으며 그를 떠올렸다. 혜나는 앨범에 실린 노래 가운데 ‘사랑이란’을 가장 좋아했다. 슬은 노랫말 가운데 함께 숨 쉬는 자유가 왠지 혜나가 생각하는 사랑에 어울린다고 믿었다.


혜나가 MSN 메신저에 로그인을 하면 둘은 쉴 새 없이 채팅을 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수히 많은 이모티콘과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채팅도 매력적이었다.


혜나의 대화명은 이슬♡이었고, 슬의 대화명은 이슬이었다. 슬은 혜나와 대화할 때마다 또 다른 이슬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건 몹시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애초에 한 몸이었다가 분리된 쌍둥이처럼 혜나가 그런 존재라도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대화를 쉽게 끝낼 수 없었다.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슬은 딱 한 번 혜나에게 가족 이야기를 했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슬을 키워준 고모는 갑자기 슬에게 독립을 하라고 명령했다. 미혼의 고모는 이제 슬이 성인이 되었으니 자신의 앞가림은 스스로 할 줄 알 거라며 말했다. 슬에게 고모는 엄마와 같은 존재라서 충격이 꽤 컸다. 하지만 고모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이 아무 쓸모 없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슬은 언젠가 혜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제일 먼저 고모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만큼 고모에 대한 애정이 절대적이었다.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낮이든 밤이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저녁에 만나 비비빅과 돼지바를 각각 먹은 뒤 그네를 타기도 했으며, 나란히 붙어 아파트 안을 쉴 새 없이 걷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혜나는 슬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슬은 완강히 거부했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안 돼.”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안 돼.”


슬은 토라진 혜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슬은 걱정이 많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특히 사랑과 관련된 문제는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게 전부라서 스스로 부딪히고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슬은 최대한 안전한 길로 가고 싶었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슬은 혜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윤상 같은 뛰어난 작곡가의 곡에 자신이 쓴 가사를 붙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유명해져야 했다. 신춘문예에 멋지게 등단해서 작가로 먹고살아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잠시, 자신보다 능력이 출중한 동기나 선배를 보며 꿈을 접고 말았다. 그 뛰어난 능력자 중에는 지호도 있었다.


슬이 중앙 도서관 2층 문학 코너에서 일본 소설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지호가 살며시 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슬비, 잠깐 나갈까?”


“어, 너구나.” 슬은 뒤를 돌아보았다.


둘은 1층 매점 뒤편 벤치에 앉았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어도 더웠다.


“덥지?”


“응.”


지호가 포카리스웨트 뚜껑을 열어 슬에게 건넸다.


“너 좀 웃기다.”


“왜?”


“내 이름. 이슬비가 아니라 이슬이야.”


“아, 그렇구나.” 지호가 싱겁게 웃었다.


“방학인데 학교에 나왔네?”


“책 좀 빌리려고.”


“뭐 읽는데?”


“이것저것.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작품 읽어보려고 했는데 누가 다 빌려 갔나 봐. 없어” 슬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집에 키친 있는데 빌려줄까?”


“정말? 그러면 고맙지.”


둘은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방학 때 뭐 하는데?”


“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해. 오늘 새벽에 지하철 터널에 있는 전등 닦고 왔어. 공기가 정말 탁했어. 게다가 먼지까지 새까맣게 전등에 달라붙어서 힘들더라.” 지호는 안전모와 방진 마스크를 쓴 채 기다란 막대로 전등을 닦은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너 참 대단하다.”


“그런 셈이지” 지호는 자신을 대견하다고 믿는 눈치였다.


“누가 그러더라. 살인 빼고 다 해봐야 한다고.”


“뭐?”


“글 써야 하잖아. 경험이 풍부할수록 좋다고 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믿어. 게다가 돈도 벌고 말이야. 넌 뭐 하는데?”


“글쎄……. 지금은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실컷 책을 읽고 싶어.”


“그것도 좋지. 키친 언제 빌려줄까?”


“또 학교에 언제 나와?”


“집이 후문 근처야. 자취하거든. 네가 시간만 되면 지금도 가능해.”


“그럼 잠시 들렀다 갈까?”


“그러자.”


지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단정했다. 단정함이 사람으로 변한다면 지호가 될 것이다.


슬은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30분 뒤에 혜나가 온다.

지호를 따라가는 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호의 자취방은 학교 후문에 있는 유명한 백반집 2층이었다. 슬은 지호의 방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지호는 방이 더럽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백반집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백반집 유리문 너머로 메뉴가 보였다. ‘여름철 특미 콩국수’라고 커다랗게 적힌 메뉴판을 읽고 있을 때 지호가 돌아왔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슬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본가에 있나 봐. 헛걸음했네. 미안해.”


“괜찮아.” 슬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감췄다.


“다음에 본가에 가면 꼭 갖다 줄게.”


“괜찮다니까. 꼭 읽어야 할 이유는 없어. 다른 책도 많아.”


지호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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