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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Nov 30. 2023

내 어린 아기새들

장일호 『슬픔의 방문』

오늘은 기분이 쉣입니다. 몰아치는 일 속에 파묻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 수습하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관된 일이라 미안함이 배가 되었습니다. 일이 몰리는 시즌이라 동료들이 다들 뾰족뾰족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여유가 없으니 인상도 사나워집니다.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이 저에게 귀띔을 해줬습니다. 누군가 제 험담을 했다고요. 알고 싶지 않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습니다.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오해하면 오해한 대로 두는 게 낫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인간이거나 개자식일 겁니다.


지금 우울이 말 떼처럼 저를 덮칩니다. 말발굽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겨우 도망쳐 나온 곳에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장일호 씨가 쓴 『슬픔의 방문』입니다. 장일호 씨는 책 서문에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나 우울할 때, 머릿속에 생각은 많으나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 계속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고 느낄 때- 그럴 때마다 저도 늘 책을 읽었습니다.


왠지 우리는 닮은 것 같군요.







하지만 첫 장부터 충격에 휩싸입니다. '아버지는 자살했다'라는 첫 문장이 저를 흔듭니다. 장일호 씨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자살했습니다. 장일호 씨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아동성폭력 생존자입니다(장일호 씨는 여성입니다). 상고를 졸업한 뒤 회사를 다니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밀린 구독료를 월급으로 갚겠다는 기막힌 포부를 적은 자기소개서 덕분에 시사인 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짝꿍을 만나 결혼을 하지만 얼마 뒤, 암에 걸립니다.


장일호 씨는 삶의 고비마다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요란하게 떠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다양한 책 속의 문장을 언급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책이 답을 주진 않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선택할 때 도움을 준다고 믿습니다. 장일호 씨도 이런 책의 효용을 믿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단순히 개인적인 아픔을 고백한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장일호 씨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장애인, 여성, 청소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자살한 사람, 비정규직,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 혹은 가지 못한 사람-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쪽,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재인용)


저는 제가 맡은 교실에서 누군가에게 곁을 주지 않는 학생,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학생,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학생, 우리가 소위 '정상가족'이라고 부르는 가정환경에 속하지 않는 학생에게 마음이 더 갑니다. 저는 제가 만난 학생들이, 내 어린 '아기새들'(제가 학생들을 부르는 애칭입니다)이, 울퉁불퉁하고 모가 난 채로, 절뚝거리며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기새들이 마음 놓고 훨훨 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 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원치 않았지만 이미 어른의 자리에 위치한 제가 아기새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 책을 읽는 내내 고민했습니다.

 

요 며칠 동안 특성화고 특별전형 원서를 쓰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우리 반에도 몇 명의 학생들이 이 특별전형에 지원했고, 3년 뒤면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게 취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학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이 소수의 아이들이 소수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 아이들도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선택한 길이며 각자의 삶 속에서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우리 어른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기분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읽는 동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고 제가 가진 문제가 세상의 아주 작은 먼지만도 못한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해하면 오해한 대로, 개자식이면 개자식인대로 저는 그냥 살겠습니다. 대신 저는 어린 새들이 날기에 좋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참입니다. 그래서 일호 씨와 저는 참 다르지만 많이 닮았다고 느낍니다. 좋은 책을 읽으니 마음도 편안해지는군요.






아기새들과 한 컷, 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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