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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Dec 02. 2023

33.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요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음, 식욕 조절을 못해서 폭식 후 토하는 것 외에는 잘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얼마나 토하죠?"


"이번 주에는 4번이나 토했어요."


의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스트레스 조절이 잘 안 되나요?"


"나름 잘하고 있다고 믿어요. 누가 제 험담을 하는 걸 알고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어요.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면 오해한 대로, 제가 욕먹으면 욕먹는 대로 그냥 살려고요. 물론 그 사실을 알고 기분이 나빴지만 그 기분 나쁨이 하루를 넘기지는 않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되게 오래갔을 텐데 그렇지는 않군요."


"맞아요. 다만 학교 일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제가 어쩔 수 없더라고요. 요새 고입 원서철이거든요. 특성화고 원서를 쓸 때 실수를 했어요. 원서에 도장을 한 군데 안 찍어서 원서 제출하러 간 우리 반 학생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어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죠. 학생에게 핫팩 하나 쥐어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학생은 저에게 "선생님이 요즘 엄청 바빠 보여요. 괜찮아요. 길 익힌다고 생각하고 한 번 더 다녀올게요."라고 씩씩하게 말해줬어요."


이 학생은  너와 나눈 대화(https://brunch.co.kr/@gomgomi36/519)에 등장하는 서연이다. 말수 적고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서연이가 이렇게 말해줘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평소 내가 서연이에게 애정을 많이 준 덕분일까? 아니면 서연이가 남을 잘 배려하는 마음씨 고운 아이이기 때문일까?


"이런 일이 처음인가요?"


의사가 내게 물었다.


"네, 원서와 관련된 실수는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실수를 했지만 큰일이 아니었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게 큰일일까, 아닐까?


"수습할 수 있었으니 큰 일은 아니죠."


"아마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의사가 이 말을 하는데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동학년 선생님도 원서와 관련된 실수를 하셨는데 잘 수습하셨고 별 탈 없이 학교를 다니신다. 나는 실수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직접 몸으로, 혹은 관찰을 하면서 익히고 있다.


"맞아요. 제 성향상 실수를 하더라도 수습할 수 없는 일,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나는 슬며시 웃었다.




"학교 일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심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입원서는 중요하잖아요. 학생의 인생과 관련된 일인데..... 학생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상담하고 부모님과도 전화통화를 해야 하죠. 원서 쓰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여요. 틀리면 안 되니까요. 여러 번 확인하고 또 확인해요. 게다가 제가 맡은 업무가 11~12월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어서 더 정신머리가 없어요. 스트레스가 심해서 밤에 잘 때는 식은땀을 뻘뻘 흘려요."


"그렇군요. 식욕 외에는 충동 조절이 안 되는 경우가 있나요?"


"전혀요. 오로지 식욕만 그래요. 아침은 소량을 먹고, 점심은 보통 양으로 먹는데 저녁만 되면 폭식을 해요. 엄청 먹고 토하고요, 토했으니 더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또 먹어요. 이게 계속 반복돼요. 토하는 순간이 너무 괴로워요."


의사가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살이 많이 쪘나요?"


"작년 이맘때쯤 아빌리파이정을 먹기 시작했거든요. 지금 1년 됐는데 5~6킬로 정도가 쪘어요. 1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몸무게가 늘어난 거죠."


"아빌리파이정의 부작용 중에 드물지만 식욕 증가가 있어요. 그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나는 수긍했다.


"이제 아빌리파이정을 안 먹고 싶어요."


"기분이 처지거나 심각하게 우울해지는 경우가 있나요?"


"아니요. 전혀 없어요. 기분 조절도 잘 되고요 학교 일 외에는 스트레스 조절도 잘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아빌리파이정을 감량하고 충동 조절 약을 써 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워낙 다양한 종류의 정신과 약을 먹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약에 대한 거부감은 있다.


"식욕 억제제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다만 이 약을 지금 먹는 약과 함께 복용하면 식욕 억제 효과가 있어요. 저도 아빌리파이정을 먹고 있는데 살이 찌더라고요. 그래서 충동 조절 약을 먹으니 체중이 약간 줄었어요."


왠지 의사가 먹는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의사도 나와 같은 약을 먹고 있다, 의사가 먹으니 효과가 있다.' 이런 말에 혹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도 역시 사람이구나.


"알았어요. 먹어볼게요."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푸는 거 말고는 어떤 방법을 쓰나요?"


"걸어요. 점심 먹고 나면 항상 햇볕을 쬐면서 20분 정도 걸어요. 저녁에도 운동을 하고 싶은데 주말부부인 탓에 애 둘을 혼자 건사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도저히 짬이 안 나더라고요. 운동 시간을 확보하려고 아이들에게 빨리 밥 먹어라, 빨리 숙제해라며 미친 듯이 재촉하는데 우리 집 애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자꾸 짜증 내고 화내는 엄마가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저녁 운동을 포기했어요. 대신 학교에서 최대한 많이 걷고 자꾸 움직이려고 노력해요."


의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엔 둘째 녀석에게 손이 많이 가요. 아직 아홉 살인데 학교나 학원 숙제를 혼자 잘 못 해요. 첫째는 저에게서 독립해서 알아서 잘하는데 이 녀석은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저를 닮아서 그런지 규칙을 정해주면 그것대로 움직이려고 애써요. 하루에 공부해야 할 분량을 딱 정해줬거든요. 그것을 일주일 내내 지켜요."


"틀을 좀 깨 보는 게 어떨까요? 잘 알고 있겠지만 그 틀이라는 걸 깨도 괜찮다는 걸 아이에게 알려주는 거죠. 그리고 첫째가 엄마에게서 독립했듯이 둘째도 서서히 엄마에게서 독립을 시켜봐요. 갑자기 독립을 시키면 아이가 불안해할 거예요. 그러니 천천히 해봐요."


"그렇게 해 볼게요. 이제껏 제가 숙제며 책가방 챙기기며 다 봐줬거든요. 혼자 할 수 있도록 조금씩 애써봐야겠어요."


진료실을 나오면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 녀석을 어떻게 독립시키지? 이 녀석은 숙제하는 내내 엄마가 자기 옆에 붙어있어야 안심한다. 학교 숙제, 학원 숙제에 집에서 푸는 문제집까지 하려면 무려 1시간 반동안 꼼짝없이 이 녀석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또 어떻게 되겠지.


그나저나 의사가 새로 처방해 준 약을 검색하니 우울증과 금연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나온다. 금연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하니 뭔가를 갈구할 때 그걸 억제하는 약이라고 이해했다. 저녁만 되면 식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먹고 토하는 일을 반복하는데 이제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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