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끝이 존재한다.
생명이 있는 것들의 유한함은 모든 것에 공평하게 적용이 된다.
계절의 끝이 그렇고
인생의 끝이 그러하듯
우리 삶에서 소중하다 생각한 것들은 그렇게 잊혀지고 지워져 간다.
나에게 폐경(완경)이 찾아왔다.
여자로서의 생명이 끝이라고 설명하는 어느 의사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던 친구들이 기억났다.
나도 상처를 받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은 해보았지만 나는 아직은 아닐 거라 믿었다.
그런 내가 마법이 풀려 버렸다니.
완경
경험해보지 못한 이 생경한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 어쩌지?
불면증으로 밤을 하얗게 새우면 어쩌나?
갑자기 눈물이 나고 우울해지면 어떻게 풀어야 하지?
체지방이 확 늘어난다는데 뚱뚱해지면 살은 어떻게 빼지?
폐경 이후는 살도 잘 안 빠진다는데.....
여자의 인생은 폐경전과 후로 나뉠 만큼 노화의 속도가 무지 빠르다던데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랬다.
사실은 폐경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몰아서 닥쳐버릴까 봐 두려웠다.
모든 중년의 여성들이 다가오지 않은 것에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고 걱정을 한다는 것은 분명 단순한 변화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이 변화가 소리도 없이 와버렸으니 아닌척해도 기분이 묘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이제는 중년을 지나 곧 노년으로 걸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나이 든 내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해보았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나이 든 케팔로스에게 나이 들어서 노령에 지내기가 어떤지, 쾌락과 관련해서는 어떠한지에 대해 물었을 때 케팔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갖가지의 욕망이 뻗치기를 그만두고 숙어지게 되는 그때에야 소포클레스께서 말씀하신 상태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니 그건 하고많은 광적인 주인들한테서 풀려나는 것이죠.”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욕망을 벗어던질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자유로움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진정 육체적 자유로움과 즐거움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중년의 여성이 폐경을 맞는다는 것은 우울함을 넘어서 자유의 즐거움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달이면 결혼 25주년을 맞는다.
즉, 큰아들의 나이가 25살이 되니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하고 살림하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버겁고 힘든 시간들이 많았다. 돌아보면 추억이겠지만 결혼도 처음, 엄마도 처음,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시간들은 깜깜한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늘 답답함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터널을 통과했다. 밝은 빛 속을 걸어가는 편안한 상태이다. 비록 마법이 풀려 여성으로서의 상실감을 느끼고 있지만 지금의 평화로움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도 다 컸고 남편도 정년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으니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두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육체적 여유까지 불러다가 덤으로 보태주고 있다. 중년 여성으로 가는 신체적 큰 변화를 기분 좋게 맞이하며 폐경을 제2의 전성기라 생각해보리라. 어떤 구속도 없는 유일한 순간,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그대는 듣게 되겠지요.
“나는 쉰 살이 되면 은퇴하여 한가하게 살 것이며, 예순 살에는 모든 공적인 의무에서 벗어날 것이오.” 그런데 그대가 장수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요? 모든 것이 그대의 뜻대로 진행된다고 누구에게 확인받았지요? 인생의 자투리만을 자신을 위해 유보해두고 다른 일에는 쓸모가 없는 바로 그 시간만을 고상한 사상에 배정하다니, 그대는 부끄럽지도 않나요? 인생을 마감해야 할 때 인생을 시작하려면 너무 늦지 않을까요? 이성적인 계획을 쉰 살 또는 예순 살로 연기하고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한 나이에 인생을 시작하려 하다니 그것은 어리석게도 우리가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이렇게 짧은 우리 인생에서 뒤늦게 찾아온 중년의 자유시간은 무엇을 해도 좋을 만큼 허용적인 시간이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의미도 잊은 채 반복적인 일상에 쫓기듯 살아내야만 했던 인생이었다면 폐경을 통해 얻은 제2의 전성기, 자유의 시간에는 보편적인 삶을 벗어나 그동안 꿈꾸고 바랐던 무엇가를 행동으로 옮겨보고 실천해보는 날들을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느리게 달리겠다고 마음먹은 심장을 다시 빠르게 뛰게 할 것이고 몸은 비록 노화의 굴레 속에 있게 되더라도 정신만은 젊음으로 회귀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될 것이다.
폐경을 맞았다.
진정한 자유가 생겼다.
자유의 티켓을 품에 안고 나는 나를 만나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인생을 마감해야 할 때 시작하기에는 내 삶이 너무 짧을 테니깐.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