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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Nov 13. 2020

슬기로운 형제 생활

우애에 대하여

가을 단풍이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옷깃을 세울 만큼 센 바람 한 자락이 불어온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마치 꽃잎처럼 나부끼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행복감이 

마음속 깊이 밀려든다. 달리는 고속도로 저 끝으로 

태양이 넘어가고 있다. 하늘도 가을을 닮아가나 보다.


운전하다가 하늘의 노을을 보고 한컷...

“ 우와, 정말 예쁘다.”

무심결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혼자 되뇌면서

머릿속에는 생각 한 자락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타는 듯 한 주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서럽게 흐느껴 울던 8살 아들. 그 모습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아들과 노을, 그 아련한 미안함이 붉은 노을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첫아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은 처음 엄마가 된 나에게 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부추겼다. 

육아와 교육에 정답은 없었지만 내 맘대로 육아방법과 좌충우돌 교육으로 부딪치며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을 거칠 때였다. 나름대로 아들에 대한 장기계획을 세우고 초등학교 4, 6학년 때는 해외 어학연수를 꼭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들의 영어 선생님 권유로 8주간의 어학연수를 결정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아들 혼자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한데 그때는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지금처럼 페이스톡이나 영상통화가 쉽게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들을 보내고 나서 그때부터 가슴이 먹먹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힘든 건 없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스카이프 전화통화를 할 수가 있었는데 그 미세한 스카이프 알림음을 놓칠까 봐 밥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먹을 정도였다. 처음 스카이프로 아들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던 날,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의젓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해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목소리마저 삼켜 버렸다. 눈물만 흘리는 엄마 옆에서 둘째 아들은 자기도 엉엉 소리 내서 울며 “형아, 형아”를 목 놓아 부르는 것이었다. 아마도 8살 동생이 이별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첫 경험이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 날 이후 둘째 아들은 저녁 대여섯 시가 되면 어김없이 텅 빈 방 안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창밖 붉은 노을을 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형아, 형아. 으흐흑.”

한 두 번 그러다가 그치겠거니 했지만 그날 이후 아들의 울음은 매일의 일상이 되었고 노을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우는 아들의 모습은 내 마음까지도 아프게 만들었다. 아들이 말했다. 

“엄마, 형아 돌아오면 의자에 꽁꽁 묶어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해. 형아 어디 보내지 마.”

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는 둘째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그리움에 애타는 저 아이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음날부터 해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쇼핑을 나갔다. 문구점 쇼핑은 형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라도 달래주었고 8주 동안 계속된 문구점 쇼핑은 필요 없는 것들도 사 모으게 되는 쇼핑중독을 만들고 있었다. 

“형아 돌아오면 이거 줄 거야. 이거 형아가 좋아할 것 같아.”

 형을 그리워하며 사 모으는 것들은 막을 수가 없었고 첫째가 돌아오는 순간까지 허용해 줄 수밖에 없었다. 노을은 동생에게는 아픔이자 그리움으로 기억되었으리라. 가끔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둘째 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먼저 떠오르고는 했다.


8주 후 큰 아들이 돌아오는 날 온 가족이 인천까지 올라갔다. 

차만 타면 잠드는 둘째 아들은 7시간가량 걸려 올라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잠을 자지 않는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비행기는 도착이 지연되었고 2시간이 훌쩍 넘어 밤 11시경에 도착, 드디어 그립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는 동안 두 아들은 곤히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져 옴을 느껴야 했다. 동생이 형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든 것이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렇게 형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까. 두 아들은 그렇게 그리워 한 만큼 사이좋게 잘 지냈다. 사실 이 정도 아파했으면 다시는 어학연수 따위는 보내지 말았어야 했지만 모진 엄마는 계획대로 2년 뒤 큰아들을 또 한 번 연수를 보냈고 그리움을 견디는 방법을 그때는 서로가 조금씩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견우직녀처럼 그리워하던 두 아들은 어느새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공부만 하고 살기에도 바쁜 청소년이 되었다. 둘째가 장기유학을 결정하고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그 당시는 메르스가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할 때였다. 정확히 세 살 터울인 큰 아들은 자사고 3학년으로 입시가 코앞이었고 자소서 쓰느라 정신없는 가을을 맞을 때였다. 학교에서는 고3 학생들에게 집에 가는 시간도 제한하며 두 달에 한번 보내줄까 말까 할 만큼 외부로 나가는 것을 제한했었다. 둘째가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던 날, 큰 아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김천에서 김해공항까지 혼자서 찾아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모두가 놀라서 한 마디씩 던지자 아들이 대답했다. 

“ 지금 가면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동생 배웅은 해줘야지. 하루 공부 못 한건 돌아가서 하면 되고 선생님께 나갔다 와서 문제 되는 건 다 책임지겠다고 각서 쓰고 나왔어.”

그렇게 떠난 동생은 일 년에 딱 한 달만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고 형제는 아주 오랫동안 만날 수 없는 상태로 청소년기를 모두 지나 버렸다. 그때 이후부터 여섯 명의 고모들은 나를 이렇게 부른다. ‘독한 애미’

아들 둘 키운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클 때 몸싸움도 좀 하고 소리도 지르고 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두 아들은 단 한 번도 몸싸움이나 말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냥 둘이 같이 있으면 늘 즐겁고 늘 재미있게 지내 주어서 형제는 그렇게 자라는 줄만 알았다. 아들들은 그래서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제 스물넷, 스물 하나의 청년이 된 형제는 지금도 만나면 잘 논다. 아주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 장총을 꺼내 들고 유격훈련과 사격을 동생이 형에게 가르친다. 먼저 군대를 간 선임으로서 후임을 가르치고 있다. 청소년기에 너무 떨어져 지내서 우애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도 서로가 서로를 참 잘 챙겨주는 모습이 대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가끔 두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아빠는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   버릴 텐데 그때는 너희 둘만 이 세상에 남게 된다고.

 그때는 둘이서 의지하고 지내야만 한다고.

 형은 부모의 역할을 하며 동생을 돌봐주고 

 동생은 형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따르면서 지내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슬기로운 형제 생활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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