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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Aug 21. 2020

아버지

큰 산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ㅠㅠ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슬리퍼를 돌려놓고 나와야지. 다음 사람이 바로 신고 들어가지."

"9시 전에는 꼭 들어와라."

"집안에서 뛰어다니지 말고 걸어 다녀야지. 양반은 뛰는 것 아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훈육과 가르침은 나에게는 잔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듣기 싫은 말일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고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루어냈다. 20대까지 동성로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던 대구를 벗어나 서울이라는 거대한 신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집과 멀어질수록 두려움과 책임감이 점점 커져간다는 것을.....

아버지를 떠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서울로의 첫 취업은  1년 만에 백기를 들고 내려오게 만들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집이 이렇게 좋고 편하다는 것을 떠나보니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사춘기의 까칠함을 모두 털어버리고 아버지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신경끄기의 기술을 적용하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라는 너그러움을 적용하니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언니는 공부를 유난히 잘했다.

중고등학교 때 뛰어났던 것은 물론 치의대를 6년 장학생으로 다녔으니 아버지의 큰 기쁨이자 자랑이었을 것이다. 언니가 공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때 아버지는 언니를 자전거에 태워 병원까지 데리고 다닐 정도로 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셨다. 그에 비해 무난하기만  했던 나는 아무리 잘하려 노력해도 티도 안 났기에 공부는 적당히 유지하며 공상과 사색을 즐겼다.

그랬던 내가 고3 때 친구들이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다음날 학교로 바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하면 성적이 오를까 싶어서 독서실 공부를 시작하였다. 밤새 공부를 할 생각으로 집이 아닌 독서실을 선택했지만 어김없이 책상에 엎드린 채 꿀잠의 아침을 맞이했다. 그래도 학교와 가까운 독서실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서 학교 마치면 친구들과 독서실로 갈 때가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은커녕 빵 한조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로 갈 때가 많았던 그 시절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에 책상에서 눈을 떠보면 잠든 내 머리맡에는 따뜻한 밥과 국과 반찬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막내딸이 대학가겠다고 밤새워 공부하는데 밥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새벽밥을 해서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다녀가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정성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크게 생겨나지 않았던 걸로 봐서 나는 철이 없든지 목표가 없든지 둘 다 없든지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조을 참 잘 들었다. 맞선을 보고 일찍 결혼한 큰 언니가 결혼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은 다해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원 없이 놀아보리라는 생각을 실천했다.

버는 대로 쓰자.

나의 20대 철학이었다.

해보고 싶은 것 들, 가보고 싶은 곳들, 사고 싶은 것들을 원 없이 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즐기고 누리며 살았다.

놀다 보니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만 할 나이가 되었고 한해만 더 넘기면 노처녀 소리를 듣게될 것 같아서 과감히 결혼을 결심했지만 내게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그때 막내의 잔꾀로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버지 공부하라고 할 때 열심히 할 걸 후회가 됩니다. 좀 알뜰하게 살걸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결혼하면 순간순간 노력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조목조목 간절함을 섞어서 편지에 담아서 드렸다. 지금 결혼 24년 차까지 무사히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아버지가 건네준 수천만 원의 결혼자금 덕분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막내딸은 늘 영악했고 아버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받은 돈으로 성대하진 않지만 초라하지도 않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평생 일 안 하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 사는 여자가 되는 게 미래의 내 꿈이었다.

현모양처로 조신히 집안일만이라도 잘하는 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로 다가왔고 두 아들의 엄마가 되고부터는 심각하게 현실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며 아이들 잘 키우고 살림만 살기를 바랐고 남편의 반대가 심할수록 나의 의지는 더 강해져서 급기야 싸움도 자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남편과 싸우고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화도 안 풀어졌는데 남편이 밉기도 해서 독한 마음을 품었다. 그만 살아야겠다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서러움과 슬픔이 커져서 급기야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잠들어있는 아버지 곁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사위를 고자질하며 그만 살게 해달라고 목놓아 울어버렸다. 돌이켜보니 그때 등 돌리고 누워서 딸의 울음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조용히  낮은 톤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는 것 아니라고.

 얼른 너 집으로 돌아가라고.

딸의 마음도 다독여주지 않고 돌아가라는 아버지가 그때도 여전히 밉기만 했다.

물론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건강히 지켜나가고 있다.


고집 센 막내딸은 남편을 이겨먹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집을 팔아서 창업을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교육사업을 시작했지만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될까? 나는 무척 힘들었고 빈곤했다. 원생이 가득해도 운영이 될까 말까인데 어디서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지경으로 운영은 아주 힘들기만 했다.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시작한 일이라서 힘든 내색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어떡해서든지 버텨나가려 했지만 고정 지출비용도 충당하지 못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은 커져만 갔다. 남편에게 손 벌리기 싫다는 알량한 자존심만 남아서 결국은 눈이 평펑내리는 날 친정을 찾아갔다. 내가 자존심 내려놓고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친정밖에 없었다.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길 바랬던 딸이 친정을 갈 때는 해결 못한 숙제를 안고 선생님을 찾아가듯 늘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갔으니 아버지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아버지께 살려달라고 또 빌었다. 

경제적으로 한 번만 쓰러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나는 진정성 있게 아버지를 설득했고 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그때도 큰 도움을 주셨다.

감사하게도 그 이후 나는 잘 버텨내었고 점점 인지도를 갖게 되면서 수익적인 여유로움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쌈짓돈 같은 노후 자금에 손을 댄 것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죄송하지만 덕분에 지금도 내가 일속에서 새로운 꿈을 가지고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발판을 갖게 해 주셨다.


아버지는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셨다.

싫은 건 싫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너무 솔직히 말씀하셨다. 그런 성격을 누가 좋아할까 싶지만 참 감사하게도 며느리 복은 있으셔서 그런 돌직구에 고집스러운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며느리가 유일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오빠 집에서 함께 사시게 된 아버지는 본인의 생활리듬을 포기하거나 타인에게 맞추는 법이 없으셨다.

새벽 5시 새벽 운동

새벽 6시 아침식사

아침 조간신문 읽기

12시 정각에 점심식사

저녁 헬스장 운동, 외부 볼 일 보기

오후 6시 저녁식사

저녁 뉴스 보고 신문 보고 잠들기

그렇게 스스로 정한 생활 속 규칙을 팔순이 되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을 하시다가 한 겨울 새벽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운동 나가시지 말라는 며느리의 말도 무시하고 어둑어둑한 아파트 화단을 걸어가시다가 새벽 살얼음에 미끄러지셔서 척추골절이 되었다. 며느리 말 안 듣고 운동 나와서 다친 것이 못내 미안하셨는지 몰래 방에 들어가셔서 끙끙 앓으셨다. 결국은 며느리에게 진실을 털어놓으시고 병원으로 가서 검사하고 입원하신 뒤 5년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요양병원생활로 연결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맑은 정신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훤히 꿰뚫고 계시던 아버지가 요양원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셨다. 건강한 정신이 점점 흐려지시나 싶더니 봄이와도 겨울인 줄 아시고 겨울인데도 여름인 줄 아시며 말이 힘들어지기 시작하신 지 몇 해가 지났다. 그래도 식욕은  유지가 되셔서 드시고 싶은 것 사다 드리는 것이 자식들이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할 수가 없게 되었되었다. 며칠 전 자글자글 뜨거운 날씨에 여름 과일을 사러 갔다가 유난히 탐스런 복숭아를 보는 순간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여름에 태어나셔인지 복숭아를 유난히 좋아하셨다. 특히 손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부드러운 황도를 좋아하셨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던 딸은 주말 요양원에 복숭아를 가져다 드리고 싶어서 탐스런 복숭아를 샀다. 코로나의 여파로 면회가 금지되어있지만 드시고 싶은 과일은 넣어드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오지 말라고 한다.

와도 볼 수도 없고 

아무 것도 드실 수도 없다고.

"왜? 그동안 말 안 했는데"

 오빠에게 따지듯 물으니 서로 걱정할까 봐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아버지가 오늘 응급실로 이송이 되셨다. 혈압이 40까지 떨어져서 요양원에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병원으로 보내드렸다고 연락이 왔다. 근무 중에 통화를 했는데 그때부터 가슴속에 불덩어리 하나가 눈으로 터져 올라온 것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쳤다. 근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노출하고 싶지 않아서 불 꺼진 강당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막힌 덩어리 하나가 눈물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프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잘해드린 것도 없는데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흘렀다.

나 같은 못된 딸 낳을까 딸이 싫다고 했는데 끝까지 못된 딸이어서 눈물이 흘렀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말하며 죽음을 너무 슬픔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정서를 비판했던 내가 내 부모의 그늘진 임종 앞에서 망연자실 울음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내 아버지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일신이 편하고 좋을 때는 아버지 챙겨드릴 생각도 안 하다가 내가 힘들고 버거울 때는 손을 내밀고 부모니깐 아버지니깐 도와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내가 너무 미워서 또 눈물이 났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자주 찾아뵙고 조금이라도 더 자주 감사함을 전해드릴 것을.

결국은 막다른 길에서 아무것도 못 해 드린 것 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이 아프도록 죄송스럽다.

이렇게 미안할 줄 알았다면  잔소리 잘 새겨듣고 실천이라도 좀 하고 살걸....

머리를 뜯고 가슴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내게는 큰 산이었다.

비바람도 막아주고 먹을 것도 풍성해서 배고프지 않게 해 주었던 풍성한 산이었다.

뛰어다닐 수도 있고 훨훨 날아오를 수도 있도록 모든 걸 해주었던 산.

세상 밖에서 지치고 힘들어 돌아오면 어디든 누워 쉴 수 있게 해 주었던 산.

그 산이 그때는 고마운 줄 몰랐다.

그래서 미워도 했고 귀찮아도 했고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 산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태양 아래 타 죽거나 폭풍 앞에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곁에 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큰 산이 사라지려 한다.

고단했던 삶을 정리하고 평화로운 길로 떠날 준비를 하신다.

그 길을 편안히 가시도록 해 드려야 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미안해요.  못난 딸이라서

아버지, 미안해요. 너무 못한 게 많아서

아버지, 감사해요. 나를 살게 해 주셔서

아버지, 감사해요. 나를 지켜주셔서

아버지, 사랑해요. 내 아버지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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