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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Sep 20. 2020

추석 잔상... 벌초를 기다리며

눈부신 가을 햇살에 떠오르는 기억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의 시 <낙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거실 창 밖의 청명한 가을 햇살이 이 세상 모든 행복을 담아서 내 머리 위에 쏟아부어주고 있다.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기지개를 켠다.


“아, 잘 잤다. 너무 좋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살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습관처럼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침 감사인사를  크게 외치고 하루를 연다.

저 사랑스러운 가을 햇살이 달아나기 전에 어디라도 나가서 걸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볼까?

어디를 걸어볼까?

아침 커피를 내리며 온통 머릿속은 느긋하게 산책할 장소를 떠올리는데 온전히 집중을 하고 있다.

남편이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부추겼는지 모처럼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나온다. 나의 잔소리보다 바람이 전하는 소리가 더 효과가 있구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코로나 확산 이후 감기는 절대 안 돼.'

그래, 감기에 걸려서는 안 된다.   

  

“날씨 좋다. 다음 주 벌초하기 좋겠는데.”     


남편의 뜬금없는 아침인사는 갑자기 산책길을 떠올리는 행복한 상상의 시간에 태클을 걸어버린다.

 벌초

그랬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가을 초입에는 어김없이 추석이 있었고 항상 가장 좋은 날 벌초를 갔던 기억이 생각났다.      

남편은 참으로 효심이 깊다.

결혼하고 25년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어머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증조 고조부의 산소까지 직접 산을 오르면서 벌초를 해왔었고 올해도 어김없이 그러할 것이다. 세상 힘든 것 모르고 자랐던 나를 꼬드겨 시골생활 체험학습을 시키듯 태어나서 안 해본 것들을 얼마나 많이 경험시켜주었는지 가끔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순진하고 철없는 신랑이 안쓰러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살았다. 이번 벌초에는 성인이 된 큰 아들-나의 금쪽같은-을 대동하여 가겠다고 남편이 선포를 해놓은 상태다. 나는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살긴 했지만 아들만큼은 정말 시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주장해 놓았다. 어차피 지금의 제사며 벌초까지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만 잘 모시고 가면 되지 않겠냐고.  

   

남편은 착하고 성실하다.

그 말은 참으로 고지식하고 답답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막내딸로 자란 나는 시골생활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는 말도 안 되는 그 말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들리는 대로 믿고 홀린 듯 결혼을 해버렸다.

솔직히 스물 하고도 아홉이나 된 나를 누가 데려갈까 싶은 생각에 남자를 고르고 저울질하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포기상태로 결혼을 선택한 나의 잘못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결혼식 후 매 순간이 서프라이즈였다.

시골마을에서 버스 5대가 하객으로 온 것을 시작으로 신행을 갔을 때 마을 모든 어르신들이 나를 보기 위해 아니 관천 댁의 아들이 어떤 며느리를 데리고 왔는지를 보기 위해 모이신 인원이 방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붉은 치마, 초록 저고리의 새색시 컨셉 한복을 차려 입고 남편의 시골집 대문을 들어설 때 고무신 신은 발로 박 바가지를 밟고 격파 후 통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첫 신행이라 나를 아버지와 오빠가 시댁에 데려다주셨다. 수많은 마을 어르신들 사이에 나를 남겨두고 돌아서서 대문 밖을 나서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가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아버지 잔소리 듣기 싫다고 대학 졸업 후 달아나듯 저 멀리 서울까지 도망가버렸던 딸이 이제는 정말 돌아가지 못할 곳으로 영영 가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 잘 살아야 한다. 갈게. 어서 들어가.”

오빠와 아버지가 탄 차가 비포장 시골길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거름냄새 가득한 밭 귀퉁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음은 서러움에 북받쳐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어린아이 마냥 그렇게 멈출 수 없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 내가 도대체 무슨 결정을 한 거지. 나 저 대문을 통과하면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갈 수 없는 건가?'

 결혼이라는 결정의 책임감과 무게감이 주체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나를 짓눌렀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듣기 싫었다.

화가 났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이대로 아버지를 따라서 친정으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새색시를 남편이 찾으러 나왔다. 남편이 나와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동네 어귀 망부석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더 이상 내 슬픔에 잠겨있을 수 없는 상황이 기막힌 타이밍에 벌어졌다.

남편의 아버지, 즉 이제는 내게는 시아버님이 며느리 본 즐거움에 술을 과하게 드시고 일어나시면서 중심을 잃으셨다. 순간 넘어지시면서 술상 모서리에 이마를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선홍색 피가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수건으로 이마를 막아주고는 어쩔 줄을 몰라 입으로" 아이고, 우짜노"만 연발하고 계셨다. 어머님은 피를 보고 쓰러지셨다.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나의 시어머님은 닭의 목은 비틀어도 피를 보면 쓰러지신다는 것을.

결혼하면 절대 원래 내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나였지만 어느새 피를 보고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자 관성의 법칙처럼 새색시가 아닌 내 본업의 책임감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버님을 눕히고 전혀 모르는 환자를 대하듯 지혈을 하고 상처의 깊이를 들여다본 후 소독약으로 1차 소독을 하고 상처 주위를 닦아낸 뒤 꺼즈를 단단하게 붙여주었다. 상황은 종료되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것에 호들갑 떠는 사람들의 모습도 나는 싫었다. 전직 수술실 간호사였던 나에게는 피 흘리는 모습은 일상이었고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아니면 응급도 아니었다. 나의 이런 모습에 또 한바탕 떠들석 난리가 났다.

"관천 댁 며느리 참 잘 봤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동네 어르신들은 지나칠 정도의 호들갑에 큰소리로 입을 맞추듯 새로이 맞이한 관천 댁 며느리의 순간 대처능력을 두고두고 칭찬 릴레이를 몸소 실천하시는 상황을 연출하셨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우울했고 슬펐고 도망갈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친정으로 도망가고 싶었고 혼인신고를 보류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집간 첫날부터 나를 힘들게 하셨던 아버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며느리 사랑을 보여주시기는커녕 단 하루도 편안한 일상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늘 아프셨고 늘 입원과 퇴원, 수술을 반복하셨다. 첫 손를 가져 물 한 모금도 다 토해내는 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병 시중을 들게 하셨고 그  금쪽같은  손주가 태어나 아장아장 걸을 때도 병원을 오가게 만드셨다.


결혼 후 첫 추석은 두 번째 난리가 났었다.

딸 여섯 낳고 아들 하나 얻는 동안 모진 세월 견뎌낸 관천 댁 며느리를 구경하겠다고 첫 명절 추석에 객지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있을 줄이야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한 명 다녀 가면 두 명, 한 팀 다녀가면 또 한 팀, 손님들의 술상은 오로지 며느리가 차려야 했었고 들고 들어가야 했었고 치워야만 했었다. 그 많던 딸들은 각자의 시댁으로 갔을 것이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며느리가 있는데 시어머니가 상을 차리고 들고 들어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났을 테니깐.


결국 첫 명절 저녁에 나는 첫 아이를 잃을 뻔했다.

뭉치는 배는 산고의 고통을 미리 알려주듯 쥐어짜듯 아팠고 나는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했다. 서러운 눈물이 끓어올랐다. 시지포스의 형벌 같은 반복의 굴레가 앞으로 내 남은 삶을 지배한다면 나는 여기서 멈춰야만 했었다.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을 겪으며 숨이 막혀왔다.

순간의 선택이 나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했구나.     

추석 보름달이 둥글게 떠있는 시골의 저녁 풍경은 참으로 신선했다.

쨍하게 더 차가운 가을 공기가 묵은 거름냄새와 풀냄새와 어우러져 코끝에서 가을을 그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음날 추석 차례음식을 모두 준비해놓고 망중한 같은 가을을 즐기는 저녁, 며느리 사랑을 병구환으로 일관되게 보여주셨던 아버님이 쓰러지셨다. 시골마을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에 아버님을 눕히고 보호자 한 명만 같이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묵언의 지시다. 간호사 출신 네가 타야지라는.

덜 잊힌 직업의 사명감으로 나는 처음으로 구급차에 올라타서 환자의 손을 잡고 바이탈 사인을 모니터링하면서 병원으로 갔다. 아버님은 한마디로 속 썩이는 아픈  손가락  자식마냥 나를 다양한  경험드로 지치고 힘들게 하셨다.     


알콜성 관절 괴사, 간암으로 병원에서 오랜 시간 지내셨던 아버님은 가을의 반대편, 벚꽃이 찬란했던 봄날 돌아가셨다. 마지막 임종 때 병원으로 달려간 자식들 앞에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더 큰 병원에 왜 안 데리고 가느냐.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두려움에 떨던 마지막 유언 같지 않은 유언을 들을 때 깨달았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삶은 질척이는 미련을 남긴다는 것     


결혼 후 첫 초상을 집안에서 치르고

집안에서 염을 하고

집안에서 조문객을 치렀다.

집 마당이며 밭에 돗자리를 펴고 천막을 치고 마당 가마솥에 고깃국을 끓이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두 출동하여 품앗이를 하며 장례일정의 모든 일들을 하셨다. 집성촌의 면모답게 대소사를 온 마을의 사람들이 나서서 함께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아버님이 평생 논갈고 밭매던 곳에서 한 뼘 떨어지신 햇살 좋은 밭터에 본인의 묘자리를 미리 찜해두셨다. 양지바른 곳에 모셔드리고 한참 뒤에 들은 바로는 그곳이 그렇게 풍수가 좋은 곳이라고 한다. 아버님은  삶의 경험과  느낌으로

풍수를   읽으셨던  것이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벌초를 안 가본 적이 없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참 평온한 곳이다.

풍수가 좋은 곳에 모셔서인지

특별히 며느리를 독특하게 사랑하셔서인지

그 후로 오랫동안 아들, 며느리의 가정은 몹시도 무탈했었고 손주들은 복을 타고났다고 할 만큼 매사에 좋은 방향으로 일이 술술 막힘없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벌초는 갈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께 고하리라.     

‘조상에 대한 섬김의 정성은 이 며느리 세대까지만 잘 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손주에게는 넘겨주지 않겠습니다.‘    

      

오늘 아침 내 삶이 여기서 멈춰도 좋을 만큼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껴안으며 나는 다짐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가 되자.


두려워하며 준비되지 않은 채로 질척이며 살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매 순간이 마지막인 듯


많은 것들에 도전하고 경험해보고 즐기고 느끼며 후회 없이 살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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