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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Oct 25. 2020

우디 앨런의 산책자 시리즈 다시 읽기

영화 <레이니데이 인 뉴욕>, <미드나잇 인 파리> 리뷰


5개월 지나, 우연한 동력에 의해, 마침표 찍은 리뷰.

1. 영화 두 편(혹은 그 이상)을 포개어보는 이유에 대하여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두 감각을 자극한다. 영화를 시각 예술과 청각 예술의 합으로 이야기할 때, 그 합은 단순 덧셈의 물리적 작용이 아니라 곱셈의 화학적 작용으로 산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인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영화가 어루만지는 우리의 감각은 두 개 그 이상의 것이 된다는 사실은 그리 신기할 것도, 강조할 일도 없는 보통의 현상이다.

우디 앨런의 '산책자' 캐릭터들의 발걸음은 도시 전체를(정확히 말하자면 우디 앨런이 그리고자 하는 그 도시의 이미지를) 스케치하여 그려내는 연필이다. 여기에 음악, 서사, 연기, 미쟝센 등 다양한 요소들이 색색이 칠해지면, 이 추악한 스케치도 감히 '아름다움'을 논할 수 있을 만한 그럴 듯한 작품처럼 보일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우디 앨런의 산책자 시리즈 <미드나잇 인 파리>와 <레이니데이 인 뉴욕> 두 편을 함께 다루며, 흐릿했던 지난날의 감상들을 다시 꺼내어 또렷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떤 작품에 대한 '흐릿한' '인상', 나는 이를 영화의 종합예술적 특징이 불러오는 착시라 부르고 싶다. 이 착시에서 벗어나 해당 작품을 '또렷이' 보는 방법으로써, 또 다른 작품과 '견주어 봄'을 택했다.

우디 앨런의 산책자 시리즈 영화들은, 내가 두 편 혹은 그 이상의 영화를 포개어보며 곱씹고 되짚는 방식을 메타적으로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영화들이다.



2. 과거로 향하는 산책자

영화 <레이니데이인뉴욕>에는 자신의 고향 뉴욕을 걸어가는 '개츠비(티모시 샬라메 분)'가, 영화 <미드나잇인파리>에는 자신이 동경하는 도시 파리를 걸어가는 '길(오웬 윌슨 분)'이 등장한다. 이들은 영화가 그리는 시간적 배경을 떠나 '과거'를 걷는 존재들이다.

길은 미지의 시간 여행을 통하여 19세기의 파리를 거닌다. 19세기의 파리는 그가 사랑하는 거장 예술가들이 흥미로운 파티와 토론으로 매일같이 세기의 창작물을 생산하는 시공간이다. 반면 현재는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적 혼을 억압하는 갑갑한 시간이다.

한편, 개츠비는 자신을 옥죄는 엄마의 도시 뉴욕을 떠나 살던 청년이다. 작은 대학교에서 꿈 없이 흐르고 있었던 그는, 오랜만에 다시 온 고향 뉴욕에서 그의 방황을 멈춘다. 어리석은 여자친구와의 결별, 기만적인 엄마와의 화해, 그리고 전 여자친구 여동생과의 결합이라는 사건이 중첩되며, 그는 뉴욕이라는 지긋했던 도시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은 과거로써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과거를 지독히도 동경하던 길은 끝내 자신이 거한 현실 또한 미래의 누군가가 동경하는 과거일 것이라는 어줍잖은 결론을 내림으로써, 과거를 혐오하던 개츠비는 과거의 과거, 즉 대과거(엄마의 과거)를 인지함으로써 말이다. 즉 이들은 과거와의 화해로써 현재적 존재가 된다. 문제는 이 '과거지향성'이 지극히 여성혐오적이라는 점이다.




3. 그의 친애하는 창녀

두 영화는 유명인들을 만나며 도시를 탐색하는 인물로 각기 다른 성별의 인물을 택한다. 그러나 '이 도시를 사랑하거나 혐오할 수 있는 주체'의 역할은 오로지 길과 개츠비에게만 주어진다.

<미드나잇인파리>에서는 19세기 파리의 명사들이 곧 세계의 예술을 결정하는 주체들이다. 이들과 만나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일과 19세기와 현재를 비교하는 시선은 교차되는데, 이때 길은 두 행위를 모두 독점한다. '세계적' 인물일 뿐 아니라 '세기적' 인물들이기도 한 예술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대상이자, 세기를 비교할 수 있는 주체로서 길이 설정된 것이다. 엄청난 특권의 독점자, 혹은 거대 자아의 현현이다.

한편, <레이니데이인뉴욕>에서는 뉴욕에서 영화계 명사들을 만나며 비 오는 뉴욕을 거니는 인물로 애슐리(엘르 패닝 분)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애슐리가 만나는 이들을 향한 우디 앨런의 시선은 조소적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하룻밤의 뮤즈'가 된 애슐리는 도시의 탐색자가 아니라, 도시의 화려함에 취하여 실재와 허구도 구분할 수 없는 거리의 방황자가 된다. 애슐리에게는 사유의 흐름과 연결되는 산책이라는 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 '혼자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없는, 혼자만의, 산책'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유는 고독한 행위이다. 사유는 타인들과 관계 맺지 않을 자유, 목적을 강요받지 않는 자유 속에서 탄생하는 행위이며, 애슐리는 끊임없이 남성'들 사이'라는 위치만을 부여 받는다. 애슐리만의 보폭은 지워진 채 개츠비-테드-베가로 이어지는 남성들에 이끌려 다니며, 더욱이 이 걸음의 목적지는 줄곧 롤란 폴라드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애슐리의 걸음은 도시와 사유를 관통하는 산책이 아니라, 도시의 화려함에 미혹된 방황이 되고, 이는 곧 개츠비라는 산책자의 탄생을 전제하는 배경이 된다. 애슐리를 기다리며 찾아다니던 개츠비는, 홀로 목적 없이 도시를 거닌다. 이 걸음은 과거로부터 도피하던 개츠비를 현실의 산책자로 거듭나게 한다.

개츠비는 이 도시에서 주변 여성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도피를 끝낸다.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는 사회적 관계망에 '미친' 엄마와의 갈등 관계는, 엄마가 사실 창녀였다는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해소된다. 몽상에 사로잡힌 여자친구 애슐리와의 관계는 단절해버리는데, 이 단절은 곧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을 의미했다. 여기서 챈(셀레나 고메즈 분)과의 새 관계는 '새로움'이라는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 우디 앨런이 그리는 챈은 애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츠비가 미몽을 깨고 나올 수 있게 하는 뮤즈 정도. 단, 애슐리는 여러 남성들의 '하룻밤의' 뮤즈였다면, 챈은 개츠비의 '몇 달 간의(혹은 몇 년 간의)' 뮤즈 정도랄까. 산책자들의 뮤즈들은 사유 주체가 되지 못한다. 또한 이 뮤즈들은 자신의 욕망을(이 욕망 또한 우디 앨런의 상상의 산물) 감추려는 인위적 행위가 금기시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사실상 우디 앨런의 시야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뮤즈와 창녀를 동의어로 인식하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관객들을 경악시킨 개츠비 엄마의 과거를 해석해볼 수 있다. 그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인위적 행위, 즉 고결함과 고상함으로 치장하려는 가식을 벗겨내야 했다.(이 인위적 행위는 우디 앨런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 엄마가 자신의 가식을 자백하고 아들과 화해하는 과정, 즉 엄마가 스스로 허물을 벗어내는 과정은, '고상한 척하는 엄마 또한 창녀였'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맺어진다.

맙소사. 이제는 우디 앨런의 상상력이 역겨울 지경이다. 개츠비는 엄마가 여는 파티장에 술집에서 만난 창녀를 약혼녀라 가장하여 데려갔다. 허례허식에 미친 엄마와 허영에 돌아버린 여자친구에 대한 반발 혹은 저항 사이 어딘가였던 것 같다. 정말 역겨운 것은 여성에게는 '가식'과 '가식 없음'의 상태가 모두 창녀로 귀결된다는 점. 그의 안일하고 역한 상상력이 참 일관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었다.

이제는 또렷이 보인다. 그가 현재를 방황하는 인물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다른 현재적 존재들을 그저 '나머지' 정도로 만들어가는, 잉여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식. 그가 낳은 혼탁한 산물의 정체가 멜랑꼴리, 혹은 낭만 등의 추상적 언어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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