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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Mar 25. 2020

'그려지는' 이의 시선,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작가 미상> 리뷰

'말하'는 대신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 두 편이 있다. 각 영화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하고 가치있는 것이냐를 떠나서, 오늘은 이들이 택한 '보여주기'의 방식, 즉 의미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과정, 혹은 그 문법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1.

물체가 가진 고유의 진동수와 일치하는 파동이 물체를 통과할 때, 물체의 진동이 커지는 현상을 '공명'이라 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공명을 낳았다. 그러나 그 공명이 여운으로까지 이어지냐 아니냐의 차이는 현저했다. 한 편의 영화는 공명이 일어남과 동시에 진동이 멈추어졌고, 다른 한 편은 그 진자의 운동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려낸 '사랑'과 <작가 미상>이 그려낸 '진실과 아름다움의 관계', 두 주제는 매우 중요한 화두이다. 기표 그 자체만으로는 진부하게 다가오는 이 기호들에, 두 영화 모두 이미지로써 새로운 기의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두 편이 담겨있는 화폭의 질감은 굉장히 달랐다. 이에 따라 어느 작품은 깊은 여운을, 어느 작품은 싱겁고도 쌉싸름한 뒷맛을 남겼다.  유감스럽게도 말이다.



보편적으로 '작가'라 불렸던 이들은 피사체를 '바라본'다. 빛에 반사되어 작가의 눈에 담기는 이들의 '모습' 실재가 아니다. 작가의 감각과 인지로써 탄생되는 그들의 모습은 온전히 작가 주관적 시선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실재를 작가들이 구현한 그 모습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보여진' 무언가다. 보여지기에 앞선, 그들의 실재는 그 '모습'에서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사진의 피사체가 되기도 초상화의 대상이 되기도 싫어한다. 전자가 무서운 이유는 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나의 실재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며, 후자가 두려운 이유는 나를 보고 그리는 작가의 눈이 그만의 인식 안에 가둬지지 않고 이미지로써 현되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내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 보여짐에 의해 나를 고정해버리는 나의 지독한 자기타자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둘은 렌즈 혹은 작가의 시선에 의해 나 자신이 대상화되었다고 느끼는 불쾌감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왼쪽) 영화 <작가미상>의 쿠르트(톰 쉴링 분), (오른쪽)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


2.

두 작가가 그리는 두 개의 초상이 등장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가 그리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 분)의 초상. <작가 미상>의 쿠르트(톰 쉴링 분)가 그리는 엘리(폴라 비어 분)의 초상이다.


마리안느는 몇 차례의 실패를 통하여, 그려지는 존재를 대상화하지 않는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쿠르트는 애초에 그려지는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 없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자신의 감각을 믿고 그리는 과정이 곧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순간 곧 미적 가치의 현현의 순간이며, 이 과정 자체가 작위적인 사실들 뒤에 가려졌던 진실을 가려내는 기능마저 가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의미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의미를 헤치는 것은, 그가 '말하는' 대신 '그리기'로 작정한 의도가, 여전히 또 다른 진실을 아득히 묻어둔 채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쿠르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은 진실을 담아내는 과정과 맞물려진다. 물론 쿠르트는 전통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아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그에게 자신의 내면을 인지하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을 찾아가게 한다. 20세기의 독일이라는 시공간, 즉 거대한 사건들에 군중이 되어야 했던 개인들의 존재성을 또렷하게 체현하기 위해, 감독이 택한 방식은 개인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쿠르트는 자신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존재들의 사진을 그대로 재현함과 동시에 뭉개버린다. 쿠르트는 실제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본떠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리히터의 '포토 페인팅' 작업은 "어느 것이나 그 자체로서는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없다. 단지 특정 상황이나 우리의 의지가 그것을 구분할 뿐. 그 어떤 전통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그의 사유의 산물이다. 그는 왜 확한 이미지에 흐릿함을 덧칠했는가. 우리는 왜 매끈한 필름의 표면 대신 작가의 터치가 고스란한 거친 질감에 마음을 빼앗겼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명료한 무언가, 즉 '사실'이라 불려져 왔던 것들에 대한 염증을.


그래서 리히터의 실제 작업과는 별개로,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야 했다. 감독이 쿠르트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진실. 리히터에 따르면 그 진실은 '모호하게' 그려졌어야 했다. 예측 가능한 전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선명한 서사에 결말 부분만 블러(blur) 처리한다는 것이, 과연 리히터의 작업의 결을 살린 것이 될 수 있을까. 관객으로서 염증을 느꼈던 부분은, 영화가 그려내는 진실의 방향은 여전히, 진실이라 불렸던(불리기 원했던) 우리의 '작위'의 역사를 방증한다는 점이다.






3.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를 그리는 마리안느는 초상화의 문법을 깨고, 그가 감각하는 감정과 생동하게 실재하던 사랑을 녹여낸다. 엘로이즈가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주체의 관계를 의심하는 일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린다. 이에 따라 그의 시선은 초상화라는 이미지로 구현된다. 여기서 화가의 시선은 명백하고도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화가의 시선이 존재할 때 그려지는 이의 시선 또한, 존재한다. 위의 엘로이즈의 대사는, 초상을 그리는 순간을 '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공간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시공간으로 바꾼다. 엘로이즈의 시선을 인식하게 된 마리안느는 더 이상 엘로이즈를 화폭에 가둘 수 없게 되었다.


쿠르트는 자신의 감각에 따라 아름다움을 탐닉한다. 누군가를 그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군중으로 살아와야 했던 그 시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외부의 소리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 내면에, 자신의 감각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성취를 위해 '소재'로 전락된 존재들이 있다. 쿠르트는 자신의 아내에게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데, 그 순간은 영영 아기를 갖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왔던 아내가 자취방 앞 계단에서 흐드러지는 슬립을 입고 임신 사실을 고하던 장면이다. 그는 이 순간을 사진으로써 재현한 후 화폭에 담아두고자 한다. 그는 휴일의 공공장소에서 아내에게 나체로 그 순간을 재현해달라고 부탁한다. 과연, 그 순간이 정말, 쿠르트에게는 아름답게만 여겨졌던 것일까.


지금까지 쿠르트는 인위적인 것들에 뭉근히 저항해왔다. 동독에서의 보장된 위치를 버리고 서독에서 새로이 모든 것들을 시작한 이유이다. 그가 자신의 예술을 찾아가는 과정은 타자들과 결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수한 타자들의 바다 속에서 침잠된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은 타자와 결별하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타자와 결별하는 일은 곧 타자를 양성하는 일과 동일시될 수 없다.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쿠르트의 모티브가 된 리히터가 실제로 사적인 시공간에서 자연스레 발현된 순간을, 공적인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재현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적 일관성을 고려한다면 이 장면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인간은 일관적이지 않다. 어쩌면 우리 존재의 운동성은 자기모순이라는 기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을 인간의 자기모순으로 표현하는 대신, 그의 예술관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과정쯤으로 묘사한다.


이 순간, 자신이 아름다움을 감각한 그 시간을 사진으로써 재현하려고 한 그 순간, 그려지는 이의 시선은 지워지고 오로지 그리는 자의 시선만이 존재하게 된다. 쿠르트는 아내를 렌즈 속에 가두었던 것이다. 이 문법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려지는 이의 시선이 인지되지 않는, 화가의 절대적인 시선에 의한 이미지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려지는 이'들의 시선을 인지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는 이에게 그려지는 이 또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발화하는 일은, "우린 모두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당신은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누군가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지시켜주는 것이다. 그리는 이의 시선만이 명백한 결과물로 현현될 수 있다 하여, 그리는 이의 시선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는 이를 바라보는 그려지는 이의 시선, 이것이 이미지로써 구현되지 않았다 하여, 그 시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간 보여지지 않아왔던 것들에게서 많은 것을 갈취해왔다. 그들의 언어를, 시선을, 사유를 빼앗아온 역사였으니까. '남아있는' 무언가, '보이는' 누군가의 세계에서 끝내 남지 못하고 보이지 못한다면, 실재했던 우리는 결국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익숙한 문법, 낯익은 서사, 보암직한 이미지를 면밀히, 또한 불편히 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간 절대적 타자로 묻어온 실존의 존재들을 집념을 가지고 호명하는 이유이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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