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욕망을 발견하고 응시하는 영화와 여성의 욕망의 존재 자체를 금하는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두 영화는 모두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전자는 2019년 제작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아씨들>, 후자는 2014년 제작된 소피 바르트 감독의 <마담보바리>이다.
1. "여자에게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작은아씨들)
로리(티모시 샬라메 분)의 청혼을 너무 일찍 거부해버린 것 아닌가, 결국 내 삶을 시대적 흐름에 타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독자적인 삶의 대가가 이렇게 혹독한 것이었다면 내 욕망을 접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조(시얼샤 로넌 분)는 외로움에 짓이겨진 자신의 마음을 마미(로라 던 분)에게 눈물과 함께 떨구어낸다.
그럼에도 그는 로리와 결혼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게 중요해보였던 순간을 자의와 타의로 극복한 후, 그는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는 일에 더욱 대담해진다. 글 쓰는 주체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현실의 관습 사이에서 길항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믿기로 한다.
반면 엠마 보바리(미아 와시코브스카 분)의 욕망은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보바리 부인은 욕망에 의해 삼켜졌다. 그의 욕망은 아주 단순히 설명된다. 낭만 소설에 잠식되어 생긴 결혼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데, 이때 그의 욕망은 더 고민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였다.
2. 소비 주체였으나 소유 주체일 수는 없었던 모순적 존재들. 자본을 소유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존재들. 이 이율배반적 존재들이 유일하게 자본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을 통한 '대리' 소유뿐이었다.
그래서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영리하다. 결혼을 경제적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은 결혼을 '낭만의 클라이막스'로 여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낭만도, 육체적 욕망도 모두 결여되었던 현재의 결혼 생활은 실패한 것이 되고, 현실을 외면한 자기도피적 존재가 된다. '보바리즘'의 탄생이다.
3. 죽거나, 결혼하거나. 여성 주인공의 관습적 결말은 이 두 상태로 압축 가능했다. 이 두 상태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엠마의 죽음은, 결혼한 여성의 윤리를 위반한 죄에 대한 형벌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고통을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부분이기도 한다. 애초에 그의 욕망들(경제적, 애정적)은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타인의 것이었지만, 그 욕망들이 좌절된 이후 바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그가 삶을 역동적으로 꾸려갈 주체가 아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보바리 부인은 '욕망 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 후반부가 감탄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주인공의 결혼이라는 결말을, 타자에 의한 고통의 종결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 줄곧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던 조였다. 납득할 수 없는 조의 결혼을 설명하기 위해, 그레타는 시얼샤 로넌에게 '조'뿐 아니라 '올콧(작은 아씨들 원작 소설 작가)'의 역할도 부여했다.
조의 유년시절과 현재를 교차하던 이 영화는, 이야기가 조와 프레드리히(루이 가렐 분)의 결혼에 다다르자 올콧의 <작은 아씨들> 출판 과정과 교차시킨다. 메타적 서사와 맞물려 전개시킴으로써 조의 일관성이 무너진 사건을 설명한다. 올콧은 자신의 책의 주인공(조)을 결혼시키는 대가로 판권에 대한 온전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때 올콧이자 조를 연기한 시얼샤로넌의 대사는 압권이다.
"돈 때문에 내 주인공을 결혼시켜야 한다면 그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그간 로맨스로 포장되었던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실체를 폭로하는 순간이다. 결혼은 경제적 거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