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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Aug 14. 2020

버려짐의 합: '아무도 몰랐'던 실재로서의 '가족'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어느 가족>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우리의 언어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간 잔여로서의 실재들을 재현한다. 특히 <아무도 모른다>와 <어느 가족>은 '버려짐'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우리의 언어가 구현할 수 없는 실재들을 다룬다.


아빠가 모두 다른 네 아이, 그리고 혈연 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여섯 명의 한 가족.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낳은 부작용 혹은 반작용을 다루고 있던 고레에다. 그는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정상가족에 속하지 못한, 그럼으로써 '버려진' 존재들이 되어 버린 이들을 조명한다.




1. 버려짐의 전제: '버림'

<어느 가족>의 노부요는 자신의 행위를 '시체 유기'라고 명명하는 조사관에게 이렇게 따진다.


"버린 게 아니에요.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남성들에게서 버려진 엄마, 그리고 엄마에게서 버려진 아이들. <아무도 모른다>는 무수한 '유기'들이 어떻게 '방기'라는 예명을 갖게 되었는지 묘사한다. 적극적으로 버리는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데도, 버려진 존재들은 생겨났다. 버려짐이라는 행위는 보이지 않지만, 버려진 것들이 즐비한 지금 이곳.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게서, 남편을 기다리던 엄마의 모습이 포개어진다. 정체를 숨긴 유기는 또 다른 유기를 낳았다. 그렇게 막내 '유키'는 죽었다.





2. '버림'과 '버려짐'의 근원


가족이었다면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가령, 쇼타와 오무라의 대화가 그렇다. '나를 두고 도망갈 것이었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는 오무라. 가족의 파국을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하여 '일부러 그랬다'고 말하는 쇼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의 관계에서, 진심이라는 행간을 포착할 수 있다. 가족 윤리는 결코 가족 관계를 지탱해주지 않는다. '당위'라는 기제에서 파생된 '기대'라는 정서는 무한한 모양새로 구현될 수 있는 가족 관계를 하나의 작위적인 상태로 머물게 한다. 또한 이 억지 관계는 무수한 '버려짐'을 낳고 말이다.


가족 윤리를 겪어보지 않은 쇼타는, 가족이 무엇인지 실감하며 가족을 호명할 수 있는 존재이다. 쇼타는 결코 오무라에게 '아빠'라고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영화 말미, 쇼타의 '아빠'라는 속삭임은 발화이자 비(非)발화이다. 오무라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게 발화된 그 호칭은 우리에게 필요한 가족 관계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 의미를 잃고 형태만 남기는 대신, 형태를 잃고 의미만 남기는 것. 쇼타는 무음의 입모양으로 '아빠'라는 호칭의 의미를 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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