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는 말한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고 말이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피해자였고, 내가 받은 차별은 널리 더 너-얼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차별‘받은’ 존재가 곧 차별‘하는’ 존재일 수는 없는 걸까? 차별의 주체와 대상이 명백히 구분 지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의 상상력은 거기까지였다.
1.
영화 <주토피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미지는 영화 초반부 주인공 홉스가 주토피아에 도착했을 때이다. 다양한 포유류 개체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다양한 ‘크기’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쥐의 출입문, 비버의 출입문, 순록의 출입문은 엄연히 다르다. 영화 <주토피아>는 동물들 간의 다양한 ‘다름’을 이미지로 그려내기 위하여 ‘크기’에 집중하였다. 도시 ‘주토피아’는 가지각색의 개체들이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개개의 존재들이 모여 공적인 시공간 곧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개개의 다름들이 모여 ‘정연한(해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문제는 발생한다.
각각의 종(種)들이 어우러져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했지만, 다름을 인식한 후 우리가 흔히 자행하는 일은, 그 다름을 ‘고정’하는 것이었다. 개개의 개체들을 구분하거나 묶는 일, 즉 분류하는 일은 개별적 존재들의 다름을 인정하며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먹이 사슬을 재생산할 뿐이다. 기득권을 장악하는 주류와 공적 사회에서 배제되는 비주류. 홉스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홉스의 상대적인 위치와 크기 때문이었다. 홉스는 작다고만 할 수 없다. 경찰 동료들에게는 주먹 하나만한 아담한 존재이지만, 마우스타운(mouse town)에서는 쓰러지는 건물들을 막을 수 있는 거대한 존재였다. 맹수들이 주류였던 세계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곧 모든 맹수들을 억압할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2.
우리 또한 서로 간 다름을 ‘고정’하고 있다. 다름을 고정하는 언어는 우리 인식이 반영된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인식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 “한국인 다 되었네요”와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아주 ‘선량한(해보이는)’ 언어는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고정하는 우리의 만연한 인식 구조를 드러낸다.
‘칭찬’이라고 불리는 전자의 한마디는 한국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든, 혹은 한국인이 되고 싶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고 외국인은 영원히 ‘온전한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고함과 다르지 않다. ‘격려’라 불리는 후자는 ‘장애’를 절망적인 상태로 전제함을 내포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다는 이 전제는, 우리 사회가 비장애인 위주로 구성되었음을 실토하는 일이다. 결코 ‘희망을 가지라’는 지극히 사적인 언어만으로는 사회의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장애를 가진 개인에게 사적인 격려 하나로 공공연한 부조리함을 견뎌내라는 잔인한 언어를 내뱉는다.
우리는 ‘다름’을 등호의 반대 곧 ‘≠’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고 재생산하는 다름은 부등호와 다르지 않다. 대소 관계를 나타내는 ‘>, <’ 말이다. 마치 어느 각도로도 재단할 수 없는 각자의 다름을 하나의 기준선에 놓고 판단하고 비교하려는 부등호처럼.
3. “전 어렸을 때 주토피아가 완벽한 곳이라고 생각했죠.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고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영화 속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어요. 삶은 복잡한 거예요. 우리 모두 단점이 있고 우리 모두 실수를 하죠. 그러니 긍정적으로 봐요. 우린 공통점이 많으니까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서로의 차이를 더 포용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노력해야 하죠. 여러분이 어떤 동물이든, 거대한 코끼리든 최초의 여우 경찰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해주세요.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게요. 자신의 내면을 보세요. 변화의 시작은 바로 여러분이며, 제 자신이며, 우리 모두니까요."
동물들의 유토피아는 완벽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유토피아도 그럴 것이다. 홉스의 마지막 대사를 읊어보며 유토피아를 되짚어본다.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았고, 도래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이를 너무 완벽한 무언가로 생각해서는 아닐까.
사회는 개인들의 합이었다. 자꾸만 망각하고 만다.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불완전한 디스토피아가 있다면,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어설픈 유토피아 또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차별하고 싶지 않다’는 공공의 인식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결국 우리는 모두 차별하고 싶지도, 차별받고 싶지도 않은 알량한 개인들이라는 사실을. 완벽하지 않은 상태는, 우리의 가지각색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기제였다는 사실을.
위의 사실들을 다시 떠올려보아야겠다. 복잡한 빈틈들이 만들어내는 청아한 불협화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