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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Mar 03. 2020

갱스터와 버틀러의 방, 그 문틈으로

영화 <아이리시맨> & <남아있는 나날> 리뷰


1.
넘치지 않게, 그러나 힘 있게 흐른 그들의 시절이라는 강물은 매우 묵직했다. 그들이 우른 강산이 몇 번 바뀐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마치, 그들은 성공적인 갱스터와 버틀러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 두 편의 영화들이 주는 여운을 잘근히 곱씹어 보았다. 단지 노년의 존재가 찬란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 시절의 생기를 역동적으로 재현해낸 것에 마음이 꿈틀한 것일까. 묵직히 버텨온 이들이 과연 시공간을 '통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스물 여덟 번의 해를 넘기고 나니, 내 머릿속을 잠식한 하나의 사실이 있다. 정체성은 늘 표류한다는 사실. 미국 현대사를 뒤흔든 엄청난 갱스터, 20세기 격동의 유럽을 주무르던 웅장한 대저택의 총관리자. 이들은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건 '인간'이었다. 이제는 대단'했던' 갱스터와 버틀러 대신, 늙어'가는'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 분)과 제임스 스티브스(안소니 홉킨스 분)가 있다. 과거형 어미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존재들. 자신의 삶을 수식하는 어마어마한 간판들이 빛바랜 꼬리표로 전락했을 때, 그 가혹한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질보다 존재를 더 고민하게 되는 요즈음. 정의(definition)에 매달려 실재를 외면한 나의 가련한 지난날들에 사과하고 싶다. 선명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흐릿해도 있다. 치열하게 매진하는 순간, 그 후에는 소진된 존재가 있다. '무엇의 잔재'라고 하기엔, 이 또한 '무엇'이다.

2.
샛길로 새지 않는 견고한 이들을 잠시나마 뒤흔들었던 이들이 있다. 지미 호파(알 파치노 분)와 메리 켄튼(엠마 톰슨 분). 이들은 프랭크와 제임스가 잠시나마 자신의 본분을 잊게 한 매혹적인 방해꾼들이었다. 프랭크는 지미와 함께할 때만큼은 갱스터로서의 역할에만 매진된 존재가 아니라, 호탕한 조합원이자 머뭇거리는 아버지,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제임스 또한 메리와 함께할 때만큼은 지독한 프로 의식을 잊고 서투른 감정에도 휘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지미를 죽이고, 제임스는 메리를 떠나 보낸다. 그들은 견고한 정체성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는다. 무어라 수식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고서야, 그들은 날것의 자신을 마주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헐벗은 자신의 나체를 응시하는 일, 이를 유보하기 위해 겉감을 더욱 두텁게 덧대었던 지난날들. 두 영화는 늙어가는 두 존재의 고독한 방문을 슬며시 열어놓았다. 이 문틈은 두 존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지내지는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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