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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Mar 04. 2021

두꺼운 현재: 외면되지도, 번역되지도 않은 과거

영화 <미나리> 리뷰



1. '되지 않기 위하여'
'살기 위하여' 삶을 벗어난다.
나를 '되기 위한' 존재로 만드는 숱한 이미지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발걸음을 스크린 앞으로, 나의 시선을 활자 위로 옮겨야 했다.

나의 삶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로 점철되어 있기에,
나의 삶에서 벗어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의 삶을 설명해줄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들을 찾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삶과 언어는, 나의 삶과 나의 언어가 되어주었다.

해러웨이의 말대로 우리는 '공-산(sympoiesis, 함께 만들기)'의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서로가 '되지 않기 위하여'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했다.



2. 두꺼운 현재
최근 가장 아껴 읽는 텍스트가 있다. 도나 해러웨이를 읽어낸 최유미 선생님의 시선이다.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우리는 지나간 것들과 다시 만난다. 과거의 실천들, 과거의 관계들을 기억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운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에 의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배울지가 결정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이때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이자 도래할 미래다. 그러므로 쑬루세(Chthulucene)의 시간은 예측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많은 이야기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들여서 기억하고 배우는 두꺼운 현존의 시간이다.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현재'를 산다. 두꺼운 현재는, 그러므로, 예측의 시간이 아니라 촉수적인 사유의 시간이다. 예측은 논리적인 틀 속에서 그것을 확장하는 것이지만, 촉수적인 사유는 이 연결이 아니라 저 연결이라면 하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이다. 그 사고 실험에 자양분을 주는 것이 도처에 있는 살고, 죽기, 협력하기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들이다."(135쪽)

지나간 것들을 다시 만날 때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럴 법해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삶은 정연하지 않다. 주체의 시점에서 대타항만을 생산해내는 과정, 즉 '우리'라고 불렸던 누군가들의 해석이 실재하는 현상과 존재를 곡해하는 일이었음에, 이제 우리는 반기를 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무언가에 덧씌워지는 작위적인 해석을 거부할 때조차, 작위적인 서사로 그 근거를 덧보탠다.

"우리의 과제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고 평화로운 장소를 다시 구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트러블을 만들고 파괴적인 사건들에 대해 강력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해러웨이 1쪽; 최유미 122쪽)

도나-해러웨이의 사유는 '무구하지 않은 삶'을 강조한다. 우리가 현재에 임한다는 것은, '난감한 문제를 치워버리'는 대신, '트러블과 함께 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처에 산재하는 트러블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영화 <미나리>를 통해 힌트를 찾아볼 수 있었다.




3. 다시, 기억하기
정이삭 감독은 아메리칸 드리머들의 삶을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서사로 꾸려내지 않았다. 감독은 자신의 파편적인 기억을 특정한 연결성으로 꿰어내는 대신, "도처에 있는 살고, 죽기, 협력하기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들"로써 과거를 호명했다



가장 공감했던 장면은, 제이콥(스티븐 연 분)이 어렵사리 농작물 판매처를 구한 순간, 즉 이들의 고통이 해소된 순간 모니카(한예리 분)가 우리는 봉합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며 이별을 고하던 장면이다. 제이콥은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어서 "치워버리"려고만 했기에 생고로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다발적인 통증은 그렇게 해소될 수 없었다. 통증을 '앓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국소적인 완치가 해소의 총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고 산재적인 앓음들을 기억해야 하며, '앓이'로서의 삶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삶은 평면적이지 않다.

제이콥이 고되게 수확한 농작물은 불타버리며, 그의 꿈은 좌절되는 듯했다. 그는 영화 내내 비옥한 땅이라 여기는 자신의 밭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결국 풍성한 미나리만 수확한다. 모니카는 남편과의 관계가 호전될 수 없다고 판단하며(옳은 판단이었지만) 남편과의 이별을 예감했지만, 결국 한바닥에서 서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잠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데이빗(앨런 김 분)의 가슴에서 나는 불길한 소리는 점점 커져갔지만, 그의 심장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던 구멍들은 점차 좁아져갔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미국에 도착한 순자는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해러웨이가 강조했던 '기억하기'를 떠올린다. 그는 기억하기를 "지나가버린 과거에서 성취만을 선별적으로 기억하는 재현"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었던 지식과 노하우만이 아니라 잔인한 선택과 힘겨운 도제살이도 함께 기억"(138)해야 한다고 고한다.

영화는 미나리가 자라는 과정을 묘사하지도, 결국 이 가족에게 미나리가 어떠한 결과를 안겨주었는지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미나리를 심은 순자(윤여정 분)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맺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나리를 심었던 순자의 모습과 미나리를 거두는 제이콥과 데이빗의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혹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은 결국 성공 신화에 사로잡힌 우리의 작위적인 이야기짓기 방식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미나리는 아칸소 땅에 심어졌고, 데이빗은 어른이 되었다. 이후에도 미나리가 '잘' 자랐는지, 이 이민자 가족이 '잘' 정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을 것이다. 잘 자랐다고 병충해를 겪지 않는 것은 아니고, 잘 정착했다고 사회의 부조리에서 자유로운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이라는 수식어는 '못' 혹은 '않'의 경우를 함께 상기시킨다. 과거를 호명하는 방식이 이렇게 이분화되지 않도록, 또한 '잘'과 '못/않'을 구분하지 않도록. 감독은 과거의 한 시절을 조각내어 가져오는 일이, 뚜렷한 인과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한예리 배우의 노래가 들린다. 노랫말은 이렇다.

"늘 한결 같은 밤 / 속삭이는 마음 / 어우러지네.
작은 발자욱 위로 / 한 방울 씩 또 / 비가 내리네.
고개를 들고 / 떠나가는 / 계절을 배웅하네.
긴 기다림 끝에 / 따스함 속에 노래를 부르네/
겨울이 가는 사이/ 봄을 반기는 아이 / 온 세상과 숨을 쉬네.
함께 맞이하는 / 새로운 밤의 품."

창자(唱者)는 읊조릴 뿐이다. 자신의 감각에 잡히는 '지나가는' 것들을. 이 흘러감에 대한 읊조림은, 과거를 외면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함'에서 파생된다. '두꺼운 현재'는 이렇게 탄생된다.


* 리뷰에 풀어내지는 못했지만 '전쟁에 연루된 존재들'로써 폴과 순자를 다시 보는 일도 흥미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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