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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Jul 01. 2021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가출을 했다.




그래서 얼마 받았는데?

처음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꺼낸 친정 엄마의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집 안 경제 상황 상 꽤나 기우는 결혼을 했고,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친정엄마가 충격받고 드러 누을 것을 걱정해 무엇하나 입밖에 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 일수도 있다. 이혼의 이유조차 “폭력”을 뺀, “사업부도”라고 했더니, 부잣집에 시집가서 잘 산다 생각했던 엄마는 본전 생각이 났는지 오히려 “잘했네 ‘라고 말씀했다.

”엄마 맞나? “라는 생각도 잠시 떠올렸다.

그래도 딸내미 앞으로 살아갈 걱정에 한 말씀 이겠거니..... 했다. 지금 친정엄마와의 애착관계 따위를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혼 당시 남편은 빚이 넘쳐 경매로 집을 해 드셨고, 현재 거주하는 집도 재산분할을 하려고 보니 그간 남편이 내다 쓴 저당금이 집값만큼이었다. 내 나이 43세에 ’ 장애아이 케어‘로 집안에 묶여있다가 사회생활 한지 여엿 7년, 그간 남편의 ’ 게으름‘과 ’ 낚시 장비 지름신‘이 내려 카드 돌려막기를 세탁기 돌리는 것보다 열심히 하던 나도 독립을 외칠 만한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다.     


그로써 재산분할 없음. 친권 공동, 양육권 아빠, 양육비 없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혼 합의를 했다.               


이혼 당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부터 살아남기였다. 막상 아이들을 데려와 봤자 고생시킬 것이 뻔한 상황이라 남편이 끝까지 고집하는 ’ 양육권‘을 아이러니하게 ’ 모성애‘라는 이유로 내줬다. 어쨌든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시댁이라는 비빌 구석? 은 있었다.(시댁도 남편의 ’ 게으름‘과 ’ 여자 문제‘로 두 손 두발 다 들었던 상황이지만, ”장로님 “으로 존경받았으니 두 손자 모른척하지는 않을 집안이다.)     


끝끝내 본인이 양육권을 가지겠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집안의 재력(저거 아빠 꺼)과 현재 들어오는 월급(저거 아빠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나의 경제적 무능력함을 비교했다. 화나고 비참하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 주제도 아일데려 와서 당장 있을 집 조차 막막했고, 또한 지금 월급으로는 나 혼자 입에 풀칠할 상황이니 달리 결정할 도리가 없었었다.     


비행기 탑승 중 기압이 떨어지면,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는데, 스튜어디스는 엄마 먼저 마스크를 끼고 난 뒤에 , 아이를 챙겨 끼워주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생각으로 훗날의 거사를 도모하는 마음이었다. 또한 그렇게 라도 아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현재의 집에 있는 것이 ’ 이혼가정‘의 충격에서도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나의 바람도 있었다.                




이혼하고 두 달 만에 집을 빠져나왔다.     

집을 빠져나올 때 ’ 옷 보따리‘ ’ 책보따리‘는 갖고 나와야겠기에, 아이들이 개학하는 3월을 기다렸다. 말이 이혼이지 양육권 내주고 돈 한 푼 없이 몸만 나오는 나는 야반도주? 와 다를 바 없는 지경이었음으로 그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3월 개학을 기다렸다. 1월 9일 이혼도장을 ”쾅쾅 “찍고도 2달이 넘게 그 집에서 숨죽여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코로나19로 개학은 매주 연기되어가고 있었고, 이혼도장까지 찍은 내가 그 집에 비비고 있을 수가 더는 없어 아이들이 시뻘겋게 두 눈 뜨고 있는 어느 날 오전, 나는 옷 보따리 책보따리 나의 책상과 책장을 옮기는 이사를 감행했다. 사실 그냥 갖고 나와도 되는 짐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이삿짐차를 부르고 이삿짐 인부들을 불렀다. 옷 보따리 책보따리 질질이고 지고 나가는 초라한 엄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오늘처럼 당당하게 너희들을 데려가겠다는 나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죄 진 것처럼 최대한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사하는 동안 방 안에서 열심히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던 아들을 보고 이삿짐 아저씨가 물어왔다.

”동생인가 보죠? “

아이들이 들었을지 안 들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들입니다 “.라고 정확하고 똑똑하게 이야기했다.

며칠 전부터 엄마가 이사한다고 아이들에게 일러두었지만 진짜 짐을 갖고 나가는 엄마를 지켜보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진짜 가출하는 거야? “라고..

”아니, 엄마 독립하는 거야. 곧 같이 살 거고, 이삿짐 옮겨 놓고 저녁 해 주러도 올 거야 “.라고 말했다.


집에서 나가니, ’ 독립‘은 맞았다. ’ 출가‘는 ’ 시집‘가는 건데, 그건 아니었고 ’ 가출'은 왠지 책임 없이 집을 나간다는 ‘비겁함’이 있는 단어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당당한 ’ 독립‘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이사 가는 충격이야 같겠지만, 당당하게 이혼했으니 당당하게 ’ 세대분리‘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당시의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당당하고 싶었다. 

나는 엄마 맞다고, 너희를 부정하고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은 잠시 ”이 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뿐이라고...          


이혼 당시 10원 한 푼 없던 나는, 월급이 조금 더 많은 직장으로 이직하면서 다니던 학교를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2000만 원을 받은 다음 지금 사는 동네 가장 허름한 아파트에 집을 구했다.

그때 친언니처럼 대하고 지낸 중개업소 소장님이 있었는데, 나의 집 구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애를 먹었다고 훗날 이야기했다. 돈은 달랑 2000만 원 쥐고 있으면서, 방은 2칸 이상이어야 한다는 둥(아이들이 있을 방.) 3층짜리든 5층짜리 든 아파트여야 한다(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함)고 하질 않나, 위치도 학교 근처(당시 큰아들 고등학교 근방)로 잡아야 한다고 고집 피웠기 했기 때문이다.

온 동네 수소문하며 이 잡듯이 방을 구하던 언니는 더 이상 상식적으로 ’ 그돈‘에 ’그런 집‘은 없었는지 언니 수중에서 4천만 원을 꺼내 내게 집을 구해주었다.          




시골 변두리에 30년 된 아파트를 급매로 6천만 원짜리를 계약해 놓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아파트 내부 상태는 그야말로 ’ 폐가‘ 였는데 벽에는 벽지 대신  곰팡이가 도배되어 있고, 욕실은 타일이 다 깨져 있었다. 이사 후 나는 박스 깔고 잠을 자며, 직장에서 퇴근하면 혼자서 몰딩이며 방문이며 페인트 칠에 전념했다. 당시 내 옷 중에 페인트 자국이 없는 게 없었는데 직장동료는 내가 ’ 투잡‘이라도 뛰고 다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양육권을 준다고 모성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집을 나온 날부터 나는 군납 보급하듯, 아이들에 대한 케어를 해 나갔다. 이른바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남편에게 이야기했는데 매일같이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출퇴근을 하며 아이들을 케어해 나갔다.          

훗날 이 ”아메리칸 스타일 이혼 부부“에 대한 오해가 남편에게 있었는지, 실제 아메리칸에서는 

이혼한 부부들이 같이 부부 같은? 생활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난 여자와 헤어진 남편은 나한테 위로받으려는 심산을 내 비췄다. 무슨 어림 반푼 없는 이야기 인가???

이제까지 네가 뭘 잘 못했는지를 처음부터 뱉어가며, 이건 성추행에 속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의 행동에 남편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나, 아이들을 무기로 본인 ’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지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 ’ 학교 일‘ 과 ’ 대소사‘ 모두 내 몫이었던 나에게 ’ 남편의 협조‘가 필요할 때마다. “네가 할 것 아니면 내한테 말하지 말라”는 무책임한 말만을 되풀이하며, 아메리칸 스타일 이혼부모의 아이케어에 반대했다.     

아이들 수발 다해주고 유학까지 보낼 것 같이 양육권을 주장했던 남편은, 나를 자신의 ’ 아내‘로 잡아두기 위해 아이들을 ’ 담보‘ 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본인 주장과는 다르게 양육에 관심 가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까지 피우고, 생활비조차 벌고 싶지 않았던 남편은 ”아내“라는 ”엄마“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더더욱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삶은 이것으로 끝내고, 나부터 살아남고 아이들을 잘 살려내 구해올 작전을 펼쳐 나갔다.     

 

사춘기 아들보다 ’ 더한 반항심‘인지 ’ 자존심‘인지 남편은 시댁의 지원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이혼 전과 같은 케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남편에게 내 양육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내 몫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 스쿨뱅킹 통장‘부터 ’ 건강보험‘과 ’ 실비보험‘, ’ 휴대폰 요금‘과 ’ 용돈‘ 까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자 (남편은 있는 돈을 자기 낚시 장비에 먼저 쓰고 남은 돈으로 공과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사용하는 이상한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다.) 남편은 '자존심'이 회복되었는지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나의 아이들에 대한 모든 케어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아이의 저녁밥은 이혼 전과 동일하게 먹이겠다는 요구를 했다. 일주일 중 반은 남편의 집으로 밥을 이고 지고 날랐으며, 반은 내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재웠다. “그래 내가 키우듯이 케어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케어해 나가고 있으니, 8할은 아이들을 내가 양육하고 있는 상태로 진행되었다.     


경제적으로 아이 키울 만큼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예전과 같이 생활하고 케어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도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다. 그런데 아이 아빠는 양육권만 달랑 데려가고 ’ 양육의무‘는 데려가지 않았으니. 나도 양육비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아이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고, 아이 교육에는 남편의 무관심과 시댁의 재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얼추 조건에 부합되어 들어간다. 남편은 ’ 아이 교육‘이라고는 관심 밖에 있었고, 시댁은 먹고 ’ 살만큼의 수준‘이 되었다. 

이혼하면서 돈 한 푼 없이 나온 내가 아이들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에는 ’ 황새 따라 하다 다리 찢어지는 꼴‘이 될 것 같고, 이렇게 하다간 아이 데려올 기반조차 마련하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였다.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 아이들의 양육권도 갖고 와야 하는 상황이었음으로 “대책”이 필요했다.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면, 혼자서 나가떨어진다. 나는 ’ 지금 상황‘에 대한 호소를 시댁에 하게 되었고, 바람난 아들 때문에 이혼한 며느리가, 그래도 아이들 케어를 한다고 하니 상황을 판단한 시댁에서 ’ 아이 양육‘에 대한 ’ 금전지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속내는 자기 아들 노후 수발 들어줄 보험 같은 ’ 조강지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나에게 “재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 걸었는데..... 이 과정에서 순조롭게 아이들에 대한 지원을 당당하게 받아낸 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에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한 부모의 부부싸움을 ’ 관람‘하지 않아아도 된 아이들은 ’ 이혼가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음에도,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더욱이 일상생활에서 일일이 통제하지 않으니, 오랫동안 장애아이 자립교육에 열과 성을 다한 내가 덤으로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한 달 번 돈의 20만 원 정도는 한 달 네 번, 일주일에 한 번 외식을 하는 날을 정했다.. 같이 살 때는 자장면 한 그릇 시원하게 사 주지 못했던 집 나간?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외식이란 것을 멋지게 시켜주니 아이들도 혹 하고 딸려왔다.

남편과 같이 무식하게 남편 욕이나 하며 나를 이해받으려고 하진 않았다. 매번 “엄마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일 이년 후면 엄마가 너희와 함께 살 수 있다’.  ”엄마는 너희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라고 말하며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보여주었다.

그러자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또한 이혼 후의 ‘엄마 행보로 서서히 누그러 지고 있었고, 그즈음 해서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늘어갔다.     

단지, 사춘기 아이가 내뱉는 엄마와의 소통이란.. 그렇게 따뜻한 정이 오가고, 덕담을 주고받는 이런 것을 상상하면 안 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외식이란 것을 멋지게 즐기고, 엄마와 총쏘기 게임(사춘기 아들과의 대화를 위해 나는 총쏘기 게임을 아이들과 피시방에서 가끔 즐겼다. 효과는 대 만족이었다 한 팀이 되어 총을 쏘며 좀비를 죽이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다.)을 즐기며 미션을 완수한 그때 

“엄마가 사랑해 아들들~~~~ ”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갖다 버릴 때는 언제고 사랑한단다.”

였다.     


충격이었다. 갖다 버리고.. 갖다 버리고,.......... 갖다 버리고..... 나는 너희를 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가슴에 내리 박힌 그 말이 몇 날 며칠이고 살아서 나를 공격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엄마에게 상처주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아이는 엄마의 이혼과 독립 이후에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이 말을 꺼냄으로써 엄마의 이혼과 아빠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수면 아래 잠자던 본인의 상처와 감정을 밖으로 처음 드러내는 말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부모의 폭력 상황'을 지켜보고 자란 아이가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 현실을 인정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어 나가는 과정을 이야기해 보겠다.            


             

우리 세 가족




ps...


이혼이라는 ‘원죄’     


피가 나는 상처가 생기면 딱지가 앉는다.

딱지는 시커멓고 흉측한 모습으로 피부에 달라붙어있다.


나도 가정폭력을 겪으며.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입었다.     


아픈 상처위에 또 원죄를 입혔다.

이혼가정을 만든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원죄를 지은 것 같다.


그러나

딱지를 잘 관리하면, 흉터를 만들지 않는다.


글쓰기는 나에게 ‘습윤밴드’ 역할을 한다.

지금 앉은 상처가 곱게 잘 아물어서

큰 흉이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딱지가 떨어지고 난 다음 발그랗고 뽀얀 새살이

돋아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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