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영 Jun 28. 2021

그래서 나는 10원한 푼 없이이혼에 합의했다.



“엄마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제 곧 사춘기 앓이를 하는 둘째가 한 말에 나는 삶이 내려앉는 감정을 느꼈다.     


그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이혼해서 그렇나?”였다. 지레짐작 호들갑을 떤 것이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각종 심리 검사를 ‘거금‘을 주고 했지만, 아이는 지극히 ‘정상발달’을 하고 있다는 결과지를 받았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나의 ‘대응방식’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혼한 지 3개월 만에 일어난 이야기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오버” 떨게 만들었을까?     



이혼을 결심하고 준비한 것은 7년 동안이다. 아이가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가족상담치료’에서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그 시점쯤이었다.

늘 하던 “이대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탈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혼 준비’를 시작하였다.     


소송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편과의 다툼에서 “이혼”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은 극도로 흥분하였다. “이혼하고 싶다” 거나 “집을 나가겠다”는 말이 나오면 남편은 나를 방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는 그 앞을 지켰다. 그러길 이틀이 지난 적도 있었으니, 쉽게 이혼해 줄 리가 없었다.     


10여 년 내도록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던 내가 이혼소송을 해 낸다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다. 하지만 절실하면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으로, 아파트 담장에 붙어있는 ‘가정폭력 상담소‘의 전화번호를 적어왔고, 방문상담을 하였다.     

그곳에서 무료 상담을 받았고, 이혼 소송이 가능하고, 승소 확률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가정폭력’은 무료로 소송이 진행된다니....‘이제껏 이런 것을 몰라서 그러고 살았냐’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부터라도 소송 준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잠시 가정폭력 상담소의 소개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그곳에서는 가정폭력에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물리적인 폭력 이외에도, 언어적·비언어적 압박과 생활습관이 나태하여 가정경제에 어려움을 계속 준다면 이것 또한 폭력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응방안을 자세히 이야기해 준다. 폭력 발생 시 ‘112’에 신고를 하고, 꼭 “사건화 시켜 달라”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사건화’가 되지 않으면, 간단한 훈방조치로 끝나버리는 데, 차후 소송 시 소급할 자료가 없어진다. 또한 112의 차를 타고 ‘응급실’을 가서 ‘치료나 진단’을 받는 것이 중요하며, 보호소로 입소를 하면, 이후의 절차는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될 수 있다. 물론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 이후로 나는 아이의 정신과 병원 ‘진료기록지’와 나의 ‘진료기록지’를 받아 모았다. 그리고 가정폭력 상담소에서 제공해 주는 ‘가정폭력 상담확인서’도 받아 모았다.  또한 남편이 극한 게으름으로 밤낮 집에서 빈둥거린다는 증거를 모았다. 각종 ‘연체 독촉장 ’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쓴 ‘남편 관찰일지’가 그것이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아주 오래도록 쓴 나의 기록도 객관적인 자료가 된다니... 안 쓸 이유가 없었다. “O월 O일 낮 2시 30분에 일어나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다가 6시에 슬리퍼를 신고 나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한 표정으로 한 시간 정도 뒤에 왔음 “. ”O월 O일 아침 5시경 낚시 장비를 챙겨나가 다음날 저녁 6시에 흙이 묻고 풀잎들을 군데군데 옷에 붙여놓고 왔는데,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들어와 씻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음... “ 이런 것들을 적어나갔다. 육하원칙에 따라 작성하려고 노력하였으니, 그때부터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증거도 증거였지만, 아무 누군가가 이것을 보고,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 “라는 말 좀 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소송 준비 자료가 들키게 되면, 나는 아마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 자료를 내 차 안 ‘스페어타이어’가 들어가는 곳에 보관해 두었는데, 가끔 고속도로 이용으로 경차가 필요하다고(통행료가 1/3이다.) 남편이 나의 차를 빌려달라고 하면,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을 때도 많았다. 나중에는 모은 ‘자료집’을 친한 친구의 차 안에 뒀다가 , 일주일치를 작성하고 다시 친구 차에 두는 ”소심한 작전“을 몇 년이나 이어나갔으니, 소송 준비는 그야말로 피와 땀이 베인 노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이가 성인(20살)이 되면 모든 것을 ‘터트리려’는 나의 계획은 일순간 틀어졌다.


아이가 고2가 되던 해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고, 나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사실 ‘배신감’은 따위는 없었다. 단지 계획과 다르게 아이가 한참 사춘기인 그때에 이혼을 할 생각에 어쩌지를 못했을 뿐이었다. 아이의 성장 상황을 보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과 상황이라는 것을 부모답게 생각해 주지.. 하는 원망은 있었다. 허긴 그러니 내가 이혼을 생각하고 준비했겠지만...

( 그래도 그 여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를 지극히도 놔주지 않는 남편을 일순간에 변화? 하게 만들어준 그분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 버릇 개 못준다 “고 당신은 괜찮은가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혼이 코 앞에 다 달았는데, 나는 사건기록이 없었다. 정작 폭력의 상황에 ‘112’에 신고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말다툼이 있던 그날, 나는 ‘상간녀’의 ‘전화번호를’ 알아야겠다고 대 드는 척하면서, 남편의 휴대폰을 쥐고 냅다 뛰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남편에게 ‘머리채’가 잡혔다. 그리고 ‘질질’ 끌려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남편이 나를 누르고 제압하는 폭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신을 놓지 않고 남편의 휴대폰으로 112에 신고를 했다. 남편은 ”네가 진짜 이렇게 신고할 줄 몰랐다 “는 표정을 지었으나, 더욱더 남편을 놀라게 한 것은 경찰이 닥치자마자 내가 한 행동이었다.


침착하게 진술을 했고, 이내 ”사건화 시켜주세요 “라고, ‘상담소’에서 알려준 매뉴얼에 따랐다. 경찰관은 ”진짜 사건화 시킬 거냐 “는 질문을 두 번이나 했지만 나는 ”그렇다 “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보호소’에 가기 전 나는 응급실을 가야겠다고 ”동행해 주세요~“말하며 경찰관에게 당당하게 요청했다.     


그 사건 이후에 남편의 태도는 조금 달라졌다. 본인도 법 아래서는 ‘죄인’인 줄 아는가 보다. 슬슬 나에게 눈치도 봤고, 꾀나 ‘침울’ 해 있었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는 태도였다. 나는 이제껏 살면서 이것보다 더한 일로 신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러나 나의 계획은 

‘이혼’과 동시에 ‘이혼가정’이라는 명칭 아래 남을 사춘기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남편의 폭력에 의한 내재된 '나약함' 이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지칠 대로 지친 나의 '무기력'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그때부터 소송의 의미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사건화 된 그날’의 ‘진술’이 필요하다는 경찰서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죄인’이 된 아빠의 자식인 사춘기 아들 둘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간 아이들의 정서를 생각해서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극히 아낀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나에 대한 험담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더욱이 경찰관이 왔다 간 그날 이후 남편은 ”자식 버린 엄마“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돈만 안다 “, ”엄마는 자기밖에 모른다. “라고....

이러한 이야기가 아이를 통해서 나에게 전해져 올 때마다, 분통이 터졌지만 아이들에게 내색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아빠일 그 사람을 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화통하게 이혼소송에 승소할 날만 기다리고 계획하고 있었던 나는, 이혼소송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춘기 아들들의 엄마에 대한 원망이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이었다. 

더 이상의 싸움과 다툼을 회피하고자 나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이혼에 합의해 주었다.     

그때의 생각은 아이들에게 또 상처를 주고 ‘지긋지긋한’ 부모 모습을 또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 줘 버린 것이었는데, 이혼 후 1년이 지나고 보니 너무도 어리석은 결정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치료되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폭력의 ‘수치심’이 ‘죄책감’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남아있었는가 보다. 이혼 후 시간이 지나자  ‘몸도 마음도 자유로와 진 나’는 이 오래된 수치심으로부터 서서히 벗어 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잘못 매듭지어진 이혼'을 바로잡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이어질 글에서는 10원 한 푼 없이 이혼에 합의한 내가, 어떻게 아이를 돌보고 키워 낼 수 있었는지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해받고 관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다.                         

사랑은 관심이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싶어 진다.


이전 02화 아이는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