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직전
해주 씨가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고 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회사 내의 사무실에서 말이다.
최근 들어 회생불가로 비쳐지던 경기지표가 슬슬 회복의 기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니 해주 씨가 근무하는 회사에도 훈풍이 불어왔다.
대표님을 비롯한 전 직원이 허리띠를 졸라맨 채로 버텨오기를 어언 3년째다. 조르고 또 졸라서 더 이상 허리띠를 조여 맬 구멍도 존재하지 않게 된 싯점이었다. 그러니 반갑다. 직원들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웃음기가 다시 생겨났다.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나?
'몸이 피곤해도 좋으니 제발 할 일이 있어 주었으면...'
했었는데 일감이 늘어나더니 주문량이 현저히 달라진다. 급기야 영업사원들의 출장도 잦아지고 회사의 임원들도 바이어들과의 미팅껀수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그동안 묵혀두었던 일별, 월별 실적판을 꺼내놓고 현황도 파악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대표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이런저런 전화로 바쁜 와중에 대표님께서 부르신다.
"헤이 구실장! 잠깐 내 방으로 좀 와요"
"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번에 베트남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여기 이 일정표 참고해서 비행기표등 세부적인 계획에 무리 없도록 예약 부탁해요"
"아, 넵 언제까지 해 드려야 하나요?"
해주 씨가 올만에 일다운 일을 맡고 있는 양 열심을 보인다.
그가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AI를 불러내었다.
"헤이 G! 지금 내가 베트남 출장일정을 보여줄 테니 출발 및 도착시간에 맞춰 티켓팅해 주고 특급호텔의 체크인아웃
빠지지 않게 예약해서 리스트업 해줘"
해주 씨는 평소 휴가철만 되면 불러내서 일정을 짜던 습관을 따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된 레퍼토리였다.
그리고 대표님이 출장을 떠났다. 해주 씨는 이제부터 휴가다.
대표님은 멀리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판로를 개척하는 동안
해주 씨는 대표님 없는 빈 사무실을 지키며 느슨해진 하루를
다소 널널한 마음으로 휴가 같은 시간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마냥 좋을 수만은 없긴 하겠지만...
그러나 역시 일은 일이었다. 분주해진 상황은 윗선이 빠져 헐렁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앉아버렸다. 빽빽한 전화벨 소리와 늘어나는 오더량에 정신이 혼미한데 대표님으로부터 긴급 호출이다.
"이봐 구실장! 일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야?"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어서 좋을 게 있어?"
허걱쓰! 예약된 호텔에 체크인하려는데 대금결제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네에? 대표님! 그럴 리가요?"
해주 씨가 놀라서 AI가 처리한 스케줄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에구머니나! 이를 어쩔~
그랬다. 지난 휴가 때 호텔예약 지급조건을 <현장결제>로 묶어 두었었는데 수정을 못하고 그냥 처리가 되어버린 거다.
착실한 G는 사실 잘못한 게 없다. 해주 씨가 짜놓은 판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닌 죄밖에 없다. 그나저나 남의 나라에 도착해서 쌩판 모르는 호텔입구에서 발목 잡혀 난처했을 대표님의 난감한 모습이 확 다가왔다.
"저 대표님! 저 혹시 잘리는 걸까요?"
제발이지 이번 출장, 좋은 결과로 귀국하게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구실장을 아니 <구해주>씨를 구해주는 건수가 반드시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현장결제> 확인하고 제대로 처리해 놨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플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