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도 될 순간들이 멈춰버린 찰나
한 때는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얼굴들이 많았다. 그 기억하고 있어야 할 많은 얼굴들이 빽빽해야 성공하는 줄로 알았었다. 그래서 그 얼굴들이 이름 뒤에 숨어있는 명함들을
수집하며 모아 두었었다. 그 이름 뒤에는 어떤 일로 만났으며
어느 학교 출신이고 고향이 어디인지 눈에 잘 띄는 색볼펜으로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도 적어 두었었다. 하다못해 가나다라식의 구별방법을 채택한 <명함집> 안에 고이 간직한 이름딱지들이 수 백장, 수 천장을 넘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반드시 명함을 받지 않아도 될 순간들이 와 버렸다. 스마트 폰의 앱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남의 명함을 사진만 찍어 대면 알아서 구분하고 분리해 주었다. 심지어는 사진을 찍지 않아도 문자로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자연히 맘만 먹으면 언제든
이름을 꺼내어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의 연락처는 내 핸드폰 속에서 잠들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잠들어 버려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표 혹은 명함들을, 하도 오래되어 먼지와 시간의 때 구정물이 순간들을 잡아먹은 것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탱탱한 입술도 아니고 이미 사라진 색기로 싱싱함을 잃고 만 다소 거뭇한 키스를 수도 없이 날리기로 하였다. 하나씩 둘씩 먼지를 뒤집어쓴 순간들을 향한 키스는 행함이 거듭될수록 자꾸만 켁켁대며 힘들어해서 별 멋은 없지만 아주 강력한 속도로 잠긴 순간들을 풀어놔 줄 파쇄기를 동원
하기로 하였다. 거친 교차음이 한바탕 울리면 작은 사각의 비닐감옥에 갇혀있던 이름이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해방의 물결 속으로 사라져 간다. <끄아악> <끄으악> <우다당>
백마를 타고 찾아온 왕자의 행색은 아니지만 분명 잠자고 있는 공주에게 생명을 넣어주기 위해 그 모양을 본떠 찾아온
나의 손길을 분명 저 사라져 간 이름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세상에나! 저 이름들을 다 풀어주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 간 이름들 중 그 주인조차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이름도 있었다.
얼마나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까? 내 주인은 이제 없으니 날 좀 놔줘요! 수도 없이 외치고 또 외쳤을 텐데 너무 무심했었다.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라고 잊지 말자고 곱게 모셔둔 기록은 사실 잊어도 될 순간들이 멈춰버린 찰나였다.
그 멈춰버린 찰나를 굳이 잊지 않겠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사소하게 방치해두고 마는 어리석음이었다. 남의 귀한 이름 석자를 데려와서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놨다가 슬그머니 풀어주는 행사를 가진 이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시게나...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합니다.
남의 이름 석자들이여! 결국 풀어 주고야 말 이름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