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 | 걸으며 생각한 것들
다시 태양이 머리 위로 내리쬐는 여름, 발걸음이 당연한 듯 실내로, 지하로 향한다. 공교롭게 일주일 동안 벌써 두 번째 코엑스에 방문하는 참이다. 한 번은 컨퍼런스, 또 한 번은 학회 참석. 어릴 적 아쿠아리움 구경 가던 코엑스에 이제는 일 때문에 방문하는 내 모습이 격세지감이다.
코엑스는 길 찾기 난이도가 극악에 가깝기로 유명하다. 서울에 계속 살아왔더라도 오랜만에 방문하면 별마당도서관 앞을 뱅뱅 돌다 지쳐 나가떨어지기 마련이다. 크고 작은 리모델링 공사도 자주 하고, 그때마다 길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기현상을 보여준다.
5년 전 즈음 작은 사업을 한답시고 친구와 매주 코엑스에서 만나 회의를 했었다. 다른 이유보다는 중간 지점이 코엑스였기 때문이었다. 일요일마다 파르나스몰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 들어가 회의를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의 회의를 마치면 한참을 코엑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업도 이제 거의 접는 지경이지만, 한때 자주 방문했던 덕에 누구와 가더라도 코엑스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소소하게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코엑스는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최고의 공간이다. 2호선 삼성역 쪽에서 들어가면 바로 쇼핑몰이 펼쳐진다.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명실상부 코엑스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별마당도서관이 나오고, 사람구경, 책구경, 간혹 있는 공연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허기가 진다. 다행히 별마당도서관에서 조금만 나서면 음식점들이 보인다. 밥을 먹고 나서는 거짓말 같이 눈앞에 카페가 있고, 커피 한잔 하며 걷다 보면 메가박스가 나온다. 만약 영화라도 본다손 치면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 되고 봉은사역 앞에는 또다시 음식점들이 보인다. 저녁은 먹고 들어가야지.
비슷한 쇼핑몰들이 서울에도 많이 있지만, 코엑스에서만큼은 유독 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다. 지하에 위치하여 양쪽 끝이 아니면 출구를 찾기 어렵기도 하고, 위아래 층으로 높게 있기보다는 한 평면에 넓게 펼쳐진 공간이라 더욱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자각하기 힘들다. 분명 어느 정도는 층별로, 구역별로 매장 카테고리를 구분하고 있는 여타 쇼핑몰과는 조금 다르다. 다분히 의도된 설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코엑스를 걷는 나는 스마트폰을 만지는 손가락이다.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의 추천에 따라 다음 영상을 시청하는 것처럼, 코엑스를 걷자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눈앞에 답가지가 주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 알고리즘에 따라 걷는다.
'방금 별마당도서관에서 나오셨군요. 오래 걸어서 목이 마르실 것 같습니다. 시원한 음료를 드시기 위해 잠바주스로 가실래요? 아니면 맞은편에 스타벅스도 있습니다.'
과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너무도 편리한 문명의 이기 덕에 우리는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삶에 익숙해져 간다. 차를 타고 갈 때든, 도보로 이동하든 네비게이션은 최적의 경로를 추천해 주고 나는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유튜브를 보면 나의 성별, 나이와 기존에 시청한 영상에 따라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자동으로 보여준다. 쿠팡에서 쇼핑을 하면, 같이 사면 좋은 것들을 곧바로 추천해 준다.
컨텐츠 크리에이터들은 '알고리즘의 수혜'를 받는다는 말을 한다. 아무리 잘 만든 제작물도 플랫폼에 전시되지 않으면 소비될 수 없다. 소비되기 위해서 크리에이터들은 성실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내도록 압박받고, 대중은 플랫폼에서 '골라준' 것들을 소비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코엑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 즐겁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볼 때 가장 행복한 것처럼. 코엑스는 최고의 공간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시대에 상응하는 플랫폼이다. 도심 속에서 가족, 연인과 함께 한가로운 여가시간을 보내기에는 최고라는 생각도 든다. 현생에 지친 현대인에게는 생각을 쉬어가는 시간이 필수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날도 덥고 무심코 코엑스로 발걸음이 향한다.
"알고리즘이 조종하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행위 능력을, 자율성을 점점 더 잃는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세계를 마주한다. 그는 알고리즘의 결정들을 따르지만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물의 소멸, 한병철, 2022]
[코엑스/삼성동]
https://www.google.com/maps/d/u/1/edit?mid=173sCMLXtUt6sRCNsscEDhJeYsMfLb2k&usp=sharing
코엑스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산책로라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길을 소개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코엑스 공략법(?)을 소개해볼까 한다. 물론 이것은 공식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준과는 무관하고 철저히 내 느낌에 따른 서술이다.
코엑스에는 크게 두 곳의 출입구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2호선 삼성역 방향과 9호선 봉은사역 방향. 중간중간 백화점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지상으로 올라가서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이 있긴 하지만 보통 코엑스를 들어오고, 나갈 때는 두 개의 큰 출입구를 많이 이용한다.
코엑스는 기능적으로는 별마당도서관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삼성역 쪽에서 바라보면 파르나스몰 쪽은 주로 음식점이 많고, 반대쪽 코엑스 입구는 주로 의류 매장이 많다. 그러다가 별마당도서관을 향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드럭스토어나 카페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별마당도서관 주변으로는 원형으로 다양한 상점이 입점해 있으며, 그중에서는 카페가 많고 사이사이에 휴식공간도 있다. 반대로 별마당도서관에서 봉은사역으로 향한다면 다시 의류 매장이 주로 보이는 동쪽, 음식점이 늘어서 있는 서쪽 방면으로 나뉘어 길이 이어진다.
만약 코엑스에서 식사 약속을 잡았다고 하면, 삼성역 쪽에서 접근하든 봉은사역 쪽에서 접근하든 역 가까운 방향에서 먼저 식사를 하면 된다. 다만, 코엑스에 있는 음식점은 주말이면 대부분 조금이나마 웨이팅이 있기 때문에 잘 고려해야 한다.
식사 후에 즐길거리를 찾는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코엑스를 카페를 가고자 한다면, 별마당도서관 쪽으로 다가가면 필시 한두 개 카페는 볼 수 있게 되고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메가박스에 가면 된다. 또한 메가박스는 돌비시네마를 갖추고 있어 프리미엄 상영관으로도 각광받는다. 코엑스 근처 구경거리를 찾는다고 하면 먼저 봉은사가 떠오른다. 도심 속 사찰로 유명한 봉은사는 산책로로도 아름답고 코엑스에서 거리도 가깝다.
만약 식사를 한 끼 더 해야 한다고 하면 코엑스에서 먹는 것보다는 삼성역 뒷골목으로 나가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회식자리에서 각광받을 수 있는 직장인용 음식점이 많고 곳곳에 잔뼈가 굵은 맛집도 있다. 와이셔츠를 입고 삼삼오오 술을 한잔 즐기는 직장인들을 보면 코엑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24.08
© Quasar
|| 걸으며 생각한 것들 || 걷기와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걸으면 생각이 차오르고, 달리면 생각이 비워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걸으며 생각한 것들, 그리고 산책로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