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아니고 샌드위치 subway
대학생 시절 내 별명은 '알바@@'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함보다는 사치를 위해 돈이 필요했다. 텐바이텐에서 학업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문구류를 털거나 엄마가 사줄 것 같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아이팟과 같은 소소한 사치를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어묵공장에서 어묵을 포장하기도 했고, 밸런타인데이에 에뛰드 공주님 같은 공주옷을 입고 백화점에서 초콜릿을 팔기도 했다. 20대에 했던 많은 아르바이트 중에서 지금까지도 내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샌드위치 전문점 써브웨이에서 일했던 경험이다.
사실 나는 써브웨이에서 일하기 전에는 샌드위치가 끼니를 대체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빵이.. 어떻게 밥을 대신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식당은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힘들 것 같은데 샌드위치는 간식이기 때문에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을 가지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전에 한 번도 써브웨이에서 구입해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빠르게 메뉴판을 스캔했다. 대충 보니 메뉴가 10~15개 정도인 것 같고 메뉴도 비슷비슷해 보이니 일도 쉬울 것 같았다. 그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 4페이지가 넘어가는 음료를 다 외우느라 고생했던 경험이 있어서 나름 머리를 굴렸다고 굴렸다.
그러나 나는 첫날부터 멘털이 와장창 붕괴되었다. 샌드위치 메뉴는 몇 개 없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몰랐다. 빵도 본사에서 그냥 완제품을 가져다주는 줄 알았는데.. 빵을 굽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야채를 다 썰고 맛살도 챱챱 찢어야 했다. 메뉴는 있으나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손님에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고 하나하나 맞춤으로 제작해야 해서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재료 준비와 그 많은 소스의 맛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무엇보다 나의 판단 미스가 결정적이었다. 나를 제외한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미 쌀 대신 샌드위치를 식사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점심시간 지나고 출출한 3~4시쯤 간식타임이니까 그때 쫌 바쁘려나?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바쁜 현대인들이 12시에 많이 찾아왔다.
일을 하는 동안 하루에 한 개의 샌드위치는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써브웨이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가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단연코 '아르바이트생이 자기 먹으려고 모든 재료 다 때려 넣어서 만든 샌드위치'라고 대답할 것이다. 육체적으로 일이 너무 고되니까 뭔가 보상을 받고 싶었나 보다.
일단 빵을 반으로 자른 뒤 속에 있는 빵을 파내서 최대한 공간을 많이 만든다. 그리고 모든 야채와 모든 고기와 살이 안 찔 수 없는 소스를 쭈압쭈압 다 때려 넣는다. 이쯤 되면 빵이 터지거나 포장지가 잘 안 싸지는데 몇 번 하다 보면 이것도 요령이 생긴다. 그 냉장고에 있는 모든 재료를 다 넣어서 만든 샌드위치는 진짜 맛있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샌드위치도 좀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아서 빵에 미트볼 소스만 푹 찍어서 영혼 없이 씹어먹게 된다.
그곳에서 온갖 나만의 커스텀을 하면서 내 음식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피클을 안 좋아하고 올리브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알게 되었다. 피클이나 올리브를 처음 먹어본 것이 아니라 다른 재료들과 조합했을 때 어떤 맛이 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야채를 썰어본 적도 처음이고 어떻게 썰어야 하는지 배운 것도 처음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야채들끼리 혹은 소스끼리 섞였을 때 내 입맛이 무엇에 환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성공스토리라면 여기에서 발전해서 음식에 미각이 트여서 셰프가 되어야 하는데... 심심하게도 나는 학업을 이유로 써브웨이와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 단순히 돈을 벌 목적으로 스쳐 지나간 곳이 의외로 내 인생에 근근이 찾아온다.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도 (물론 근무기간을 좀 뻥튀기했지만) 써브웨이에서 일했던 경험을 크게 어필하여 시드니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돼서 현지인이 운영하는 샐러드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곳과 한인이 운영하는 곳은 시급이 거의 두 배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곳에서 첫 번째 잡을 갖게 된 것이 그 후에도 나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려고 마음먹었을 때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다. 배달음식과 탄수화물 파티로 행복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딱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아 지금 스톱하고 몸을 재정비해야겠구나 할 때 일단 식단부터 관리를 한다. 그때 그냥 닭가슴살 10만 원어치 사는 내 호적 메이트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좋고 신선한 재료들을 가지고 어떻게 믹스해야 내가 이 풀떼기들을 먹으면서 성질 버리지 않고 그나마 인간다운 성품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가? 이때 써브웨이에서 일할 때 먹었던 기억들로 나의 입맛 데이터를 소환해서 메뉴 구성을 한다. 이미 사장님 돈으로 이것저것 실험을 해봤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낮다.
샌드위치를 쌀 때도 비록 나에게 써브웨이용 유산지는 없지만 글래드랩으로 기가막히게 잘 싼다. 먹으면서 내용물이 흐르는 것을 최소화하고 뭉개지지 않도록 잘 여며서 싼다. 의외로 샌드위치 포장 기술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둘둘 말아 포장할 때도 잘 써먹고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하게 먹어야겠다는 다짐의 횟수가 더 늘어날 텐데 그때마다 나는 20대 한 귀퉁이에 있는 써브웨이를 추억하며 맛있는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스쳐 지나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한 나만의 인연이 되어 오래오래 함께 한다.
글을 마치며 왠지 써야 할 것 같은 나의 최애 샐러드 소스 레시피를 공개한다.
간장+식초+후추+파마산치즈+아몬드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