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트럭, 소화기 난사… 난장판이었지만 그 또한 추억으로 남았다.
대학 축제는 원래 봄에 한다. 이제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봄 축제 이름은 본디 대동제였다. 지금이야 뭐 축제도 대학 브랜드 가치라고 그럴싸한 이름도 가져다 붙이고, 공연 오는 연예인 라인업을 총학생회 역량 평가하는 척도로 삼는 게 대학 축제다. 그러니 옛 선배들이 이런저런 구색을 붙여 지어놓은 이름 같은 걸 기억하는 사람은 캠퍼스에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기사, 지금 생각하면 아무 내용도 본질도 없는 축제에 구태여 무슨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야말로 너무 궁색하고, 동시에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닌가 싶다. 2010년대 학생운동권들은 대부분 그런 실수로 화를 자초했다. 우리 학교가 대표적으로 그랬고, 나야말로 내 현장이었던 단과대학에서 그랬다.
새내기 시절에는 5월 축제가 전면 취소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축제를 한 달 앞두고 수학여행 가는 고등학생들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 내 대학생활을 돌려놓은 전환점이었기도 했던 그 사건. 80년대 학번이 광주 귀신을 어깨에 이고 대학생활을 했다면, 우리는 그 배를 뭍으로 올리기 위해 대학생활을 해야 하는 학번이었을까. 나는 14학번, 세월호 학번이었다. 우리 학교의 다른 캠퍼스는 안산에 있었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그 누구도 축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는 진짜 다들 그랬다.
2학기가 되자 하지 못했던 봄축제를 가을축제에 합쳐 다시 열기로 했다. 과 집행부 선배들은 꽤 힘들 거라고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축제기획단을 모집했다. 메뉴판을 만들고 재료와 술을 주문하고, 졸업생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준비는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축제의 막이 올랐다. 캠퍼스 한 켠에 마련된 우리 과의 자리. 우리는 정신없이 술을 나르고 테이블을 세팅했고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그때 '레몬소주 주체'를 맡아 다른 동기 몇과 한 구석에서 레몬소주를 만들었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주와 레몬맛 시럽을 섞는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동기들은 '먹거리 X파일 신고감'이라며 킬킬댔다.
공식적으로 주점은 03시까지 마치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은 당연하게도 지켜지지 않았고, 학교나 중앙(총학생회)도 굳이 개입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늦어지고 외부 손님도 없으면 우리는 장사를 접었다. 그리고 남은 재료와 술을 모아 재학생과 동문이 모여 부어라 마셔라 그야말로 잔칫상을 벌렸다. 하지만 그 잔치가 막을 내리면 테이블을 정리하고 비품을 학생회실로 내려야 했다. 술을 마시던 고학번들도 붙어서 우리를 도왔다. 그렇게 얼추 정리가 끝나면 몇몇은 학교 앞에서 고생했다며 술잔을 돌렸고, 해가 뜨면 그제야 자취방으로 기숙사로 흩어졌다. 물론 몇 시간 눈 붙이고는 초췌해진 몰골로 강의실에 들어가 출석이라도 찍어야 했다. 그렇게 꼬박 2박 3일을 구르면 축제가 끝났다.
대부분이야 그렇게 1학년 때 학과 주점에 동원되어 노동을 제공하고, 이듬해부터는 해방되어 공연을 보러 가든 지인들과 주점을 즐기든 하는 게 보통이었다. 선배들의 강압적 동원에 불만이었던 동기들은 이듬해 자유의 몸이 되어 다들 각자의 축제를 즐기러 사라졌다. 나는 예외였다. 과를 거쳐 단과대 집행부와 대표자를 내리 계속했던 나는 그러고도 몇 년을 더 일해야 했다. 입학 5년 차가 되고서야 처음 연예인 공연도 보고, 일 안 하고 술 사 먹는 위치가 될 수 있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대학 축제. 실무는 차고 넘쳤고, 준비부터 집행까지 단위에서 사고라도 터질까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피고 노력해도 별 희한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터졌다. (예전 글에서 짧게 언급했던, 단과대 복도 소화기 난사 사건도 축제 때 터졌다. 아직도 누군지 모르는데 잡히기만 하면 그냥...) 축제를 책임져야 하는 학생회 간부들은 끊임없이 고통받았지만, 축제에 대한 '학우들의 요구'는 컸기에 우린 그걸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운동권들은 '대중사업'을 잘해야 했고, 축제는 우리의 가장 큰 '대중사업'이었다.
기억나는 사건 하나.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기억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다.) 그때 중앙집행위원장을 했던 10학번 선배는 축제기간 넓은 캠퍼스를 관리하기 위해 스쿠터를 타고 학교를 누볐다. 내색은 않았지만 나는 내심 그의 교통안전을 걱정했다. 그런데 교통사고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스케일로 터졌다. 학내 전 단위 주점에 납품을 위해 학교로 초대형 탑차가 올라왔다. 그런데 우리 학교 캠퍼스는 산을 깎아 지은 격이라 워낙 경사가 심하기로 유명했고, 혈기왕성 대학생들이 며칠 밤을 취하기 위해 준비한 술의 하중은 실로 상당한 것이었다. 결국 하중을 견디지 못한 화물차가 경사를 타다 그만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천만 다행히도 사람이 다치진 않았지만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오매불망 주류 배송을 기다리던 수십 개의 학과 학생회 간부들은 부랴부랴 다시 배송이 다시 올 때까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또 하나. 3학년 단과대 회장 때다. 우리 단과대 소속 타과 주점에 나이 지긋한 초고학번 동문선배가 왔는데 대작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나는 그 과 학생회장 부탁으로 옆 학과 술자리에 합석해 있었다. 그런데 부학생회장과 우리 과 학생회장 형이 날 찾았다. 자리에서 빠져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사정인 즉 이랬다. 과 후배들이 주점 서빙을 하며 보니 한 테이블에 네댓 명이 모여 술자리를 벌이는데 얼굴이 너무 앳되보이더란다. 가뜩이나 중앙과 단대에서 미성년자 사고 예방을 위해 신분증 확인을 강조한 터였다. 후배들이 가서 신분증을 요구하자 머뭇거리던 녀석들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튀었고, 미처 상황을 기민하게 살피지 못한 한 여자아이만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이다.
후배들은 일단 학생회실로 자리를 옮겨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소속도 이름도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답하지 않는 아이는 무표정인지 울먹이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겁에 질린 듯 좀처럼 말이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경찰에 인계하거나 해야 할 상황. 하지만 솔직히 그럴 겨를도 없었다. 상의 끝에 이 아이를 일단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게 잘 한 선택이었을까. 이제야 솔직히 하는 얘기지만.) 혹시 또 다른 곳으로 샐지 모르니 아예 캠퍼스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일단 다시 돌아오면 곳곳에 포진한 학생회 간부들에게 인상착의를 유포해 놓았으니 반드시 잡힌다고, 그땐 경찰서라고 허풍과 거짓을 섞어 겁을 좀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해서 몇 년 뒤에 당당히 여기서 술 먹으라고 했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까 같이 먹다 도망간 걔네랑은 친구 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교문 나가는 내리막 앞에서 그 친구와 인사한 뒤, 학교를 빠져나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얼라리?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까 튄 친구놈들이 금세 따라붙었다. 이런 괘씸한.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 것 같아 돌아섰다. 더 지켜보기에는 자리를 이미 너무 오래 비운 터였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반이었을까. (전해 들은 거라 정확한 건 아닌데) 다른 단과대 주점에서는 팔에 용 문신이 올라가던 어깨들이 술을 먹다가 패싸움을 벌였는데, 잡아다 신분증을 까 보니 미성년자였다는 해괴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여간 대학 축제와 주점은 온갖 사건 사고와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내며 해를 거듭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이 온갖 사건사고를 도저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교육부와 대학본부는 축제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학생자치 개입이라는 반발이 나왔지만, (이제서야 좀 솔직해지자면) 뭐 사고뭉치 대학생들이 할 말이 있어야지. 3시가 넘어도 그냥 두던 학교는 어느 해부턴가 2시가 되면 전기를 차단해 버렸다. 정부는 규제를 위해 식품위생법과 주세법까지 들고 나왔다. 그러자 이듬해 대학가에는 "술은 외부에서 사 오고 안주만 파는" 편법 주점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다음 해부턴 주점문화가 슬슬 사라지고 일일호프(외부 술집을 빌려 하루 장사하는 것)로 대체되는 흐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축제는 멈췄다.
간부 입장에서 축제는 정말 힘들었다. 말 안 듣고 사고 치는 학우들을 보고 있자니 욕이 절로 나오고 '학우 대중관'이 무너졌다. (우리한텐 그런 게 중요했었다. 학우들이 변화 발전을 만드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고 뭐 그런 복잡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항상 간부들이 학개론-학우 개X끼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물론 학년이 차니 그마저도 이해하고 여유롭게 받아주는 너른 품도 생기긴 하더라. 해마다 단과대 4개 과 주류 발주 넣고, 전기 배선해주고, 천막 펴주고, 전구 끼워주고 하다 보니 그 계통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이쯤 되니 아이들이 뭐 안 되기만 하면 날 찾았다. 친구들이 내게 도움을 청해 올 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좋았다. 그 모든 게 다 무슨 의미였나 싶다가도 또 그립기도 하고. 그 시절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그렇듯, 축제에 대한 기억도 양가적으로 남은 것 같다. (사실 축제에 대해 나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은 게, 훗날 총학생회 선거에 낙선한 이유 중 하나가 축제 운영 실패였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또 언젠가 나중에 기회를 빌려.)
단과대 간부라는 핑계로 단과대 동아리 이름 모를 후배들 공연도 억지로 가서 봐주고 나중에 마주치면 그때 공연 멋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과도 아닌데 애들 술도 팔아주고 하면서 친한 척하고, 청소랑 마무리도 도와주고 하다 보면 다른 학과 후배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러면 또 그 친구들은 날 좋아해 줬고 나도 그 친구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별한 대가 없이 사람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일.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하지만 그땐 그게 되더라.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와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물론 그게 진짜 '사랑'이었는지는 내 나름의 회의가 있다.) 축제가 끝나면 어느덧 1학기의 끝이 보였고, 그즈음이면 그 해 새내기들 한 절반과는 대충 얼굴 정도는 틀 수 있었다.
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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