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를 보내다
※ 일러두기 : 이 편지는 1998년에 첫 번째 직장에서 권고사직 당한 후, 1999년 1년간 단기선교로 캄보디아 프놈펜기술학교에서 컴퓨터 교사로 지내던 시절에 썼던 기도편지입니다. 70년 개띠 아재 직딩기 4편과 (https://brunch.co.kr/@givemyself/69)과 5편(https://brunch.co.kr/@givemyself/96) 사이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정전이 잦았고 전화선을 통한 모뎀으로 느린 인터넷 연결만이 겨우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글은 이메일로 썼습니다. 24편의 편지와 베트남 육로 여행기 9편, 총 33편의 편지글로 이뤄져 있습니다. 1999년 세기말, 30세 청년 박경규가 26년 후 2025년 56세 장년 박경규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해 봅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만 넣은 편지였지만, 브런치에는 최대한 열심히 사진을 찾아서 넣어 보려 합니다. 사진은 스캔해서 넣어서 화질이 좀 나쁠 수 있고, '단기 선교사'로 쓴 글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쓰던 글투, 말투가 좀 오그라들지만, 오타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수정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등장하는 실명들도 그냥 두었습니다.(불편하시다고 알려주시면 바로 그분은 익명처리 하겠습니다.)
기도편지(1) 1999.1.14. 목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께
안녕하세요? 이곳은 캄보디아 프놈펜입니다. 지금은 수요일 저녁이고요,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 9시 넘어서 이곳 프놈펜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는 동갑내기인 김도완 전도사(성균관대 스카 출신, 장신대 신대원 3학년 휴학 중), 주혜원 전도사님과 함께, 서울에서 방콕을 찍고, 프놈펜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지금 약 28도의 추운(?) 날씨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긴팔옷, 잠바를 입고 다닙니다. 요즘은 건기인데, 저희가 도착한 월요일 밤과, 화요일 저녁, 수요일 오후 3일간이나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상기후”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곳의 비는 스콜성의 비로, 먼지를 가라앉혀 주고,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비이지요. 98년 11월 중순부터 한 번도 오지 않던 비였거든요. 저희는 아마도 “레인메이커”가 아닐까요? 푸하하... 그 전의 컴퓨터 강사였던, 이성욱 전도사의 경우도, 이곳에 자신이 도착한 후로부터 우기가 시작될 때까지 한 번도 비가 온 적이 없었다고 하니까요.
하도 위험하다는 경고를 많이 들어서인지, 공항에 내려서 입국심사하는 경찰관을 보니, 조금이라도 짜증 나게 하면 총이라도 빼어들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첫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지만, 건물에 드리워진 차일뒤에 숨어서 온통 모터 사이클과 차와 자전거가 엉켜서 달리는 도로를 숨어서 내려다보았습니다.
이곳의 자연은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파란 하늘이 구름 위로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많습니다. 프놈펜은 프랑스의 지배당시에 계획도시로 지어져서 도로 구획은 비교적 잘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도로라고 해야 편도 2차선 정도이고, 포장도로가 주요 간선만 약간 되어 있습니다. 태국의 방콕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는 높은 건물이라고는 거의 없고, 기껏해야, 3,4층짜리인데, 오로지 하나 엄청나게 큰 인터 컨티넨탈 호텔이 프놈펜 기술학교의 근처에 휘황찬란하게 서 있습니다.
화요일 아침에 이곳 학교의 3층 위에서 주위를 살펴보면서, 과연 내가 이곳 먼 캄보디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하늘도 한국에서 보던 하늘이고, 구름도 그러했지만, 낮은 건물들 사이와 위로 보이는 야자나무와 코코넛 나무들의 잎들이, “넌 지금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거야”라고 말해 주는 듯했습니다.
천장에는 “찐짜”라는 가운데 손가락만 한 도마뱀이 형광등 옆을 기어 다니고, 영덕게처럼 쪼그만 몸통에 긴 다리를 가진 거미 두 마리가 사이좋게 화장실 천장에 매달려서 놀고 있습니다. 이곳의 동물들은 전체적으로 길쭉한 것 같습니다. 참새인 것 같은 새를 보았는데, 약간 길쭉하게 생겼고, 소도 말랐고 다리와 목이 길어서 멀리서 보고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개들도 언뜻 보면 작은 사슴처럼 길쭉하고, 어떤 녀석들은 하이에나처럼 생겨서 한국의 투실투실한 똥개들처럼은 친근감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래도 맛은 좋다고 합니다. (이곳에도 한국인 식당이 있으니까요. 푸하하. 네, 인상을 쓰고 있는 자매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군요. 캄보디아 사람들은 개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돼지를 개처럼 기른답니다. 오늘 프놈펜의 약간 외곽에 갔었는데, 동네에서 어슬렁거리고 누워있는 3마리의 돼지를 보았습니다.) 참, 그리고 이곳 프놈펜 지역의 모기는 말라리아를 옮길 위험은 별로 없다고 하셔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곳 모기는 서울의 모기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 가지 유일한 차이는 “쉿! 소리 없이 강하다!” 레간자도 아니면서, 차 흉내를 내며 소리도 없이 접근하여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는 것이지요.
이곳에는 유선으로 전화를 설치하게 되면, 전화선을 끊어가는 사람이 많아서, 무선전화를 설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신속도가 무척 느립니다. 한 달에 6시간에 40달러를 지불하고 통신을 사용하는데, 느려서 웹을 통한 정보검색이나 telnet접속은 어려운 듯합니다. 40달러면 한국에서는 5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물가 수준으로 생각하면, 40달러는 40만 원의 느낌을 가지기 때문에 무척 비싼 돈을 지불하고 있는 듯이 생각이 됩니다.
위험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저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학교밖으로 발을 딛었습니다. 오늘은 크메르 루즈(크메르는 캄보디아의 옛 왕조의 이름입니다. 마치 한국에게 있어서는 고려나 조선이라는 의미와 비슷하겠지요. 이곳 언어를 ‘크메르어’라고 부르고, 이곳 사람들을 ‘크메르인’이라고 부릅니다. “루즈”는 불어로 “rouge”으로 붉은, 빨간이라는 불어입니다. 불어를 배운 지 10년이 지나서 단어가 정확한지 잘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붉은 크메르인”라는 의미지요.)의 통치하에서 저질러졌던 만행을 볼 수 있었던 두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통치하에서 800만의 캄보디아인구는 600만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모든 국민이 최소한 자신의 사촌 중의 한 사람 이상은 잔인한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가족관계를 물어보는 것은 일종의 실례가 된다고 합니다.
“킬링 필드 기념탑”과 “뚤쓸렝 박물관”에 갔습니다. 킬링 필드 기념탑은 죽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묻혀 있던 지역에 세운 해골로 이뤄진 기념탑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평화로워 보이는 이 땅에 높이 세워진 웅장한 탑 속에 누렇게 빛이 바랜 해골들이 차곡히 쌓여있습니다. 그곳에 날아다니던 많은 새들과 나비들이 마치 그들의 영혼들인 것처럼만 느껴졌습니다. 그곳의 보리수나무는 여러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있어 둥걸이 굵고 높고 울창하게 서 있습니다. 안내를 했던 이성욱 전도사는 그곳의 보리수나무를 보면서, 그 엉켜있는 줄기와 뿌리가 마치 땅속에 묻혔던 사람들의 팔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뚤쓸렝 박물관은 원래 뚤슬렝 고등학교였던 곳을 수용소로 개조하여 사람들을 학살하였던 곳입니다. 2만 명의 수용자들 중에 단 5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베트남 정권이 크메르 루즈가 점령했던 프놈펜에 급격하게 진격하면서, 그곳의 만행은 미처 소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참혹한 사진들과, 5명의 생존자 중의 한 명이었던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교실과 독방들 사이에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아기의 다리를 한 손으로 잡고 나무에 패대기쳐 죽이고, 깡통을 던지듯 아이를 하늘로 던져 올리고 총으로 난사하고, 날카로운 톱으로 사람을 죽이는... 같이 간 저와 김 전도사와 주 전도사님은 “영이 짓눌리는 것만 같다”라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도착했던 때부터 무엇인가 느껴왔던 막연한 답답함의 정체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서경기 목사님은 이곳 사람들은 조상 및 정령숭배, 그 외부에 힌두교, 그 외부를 불교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화로운 듯이 보이지만, 그 모습 이면에 숨어있는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14일 목요일입니다. 어젯밤에 편지를 쓰다가, “므비보셋“이라는 선교회를 시작하며 장애인 선교를 하시는 김철환 목사님 댁에 인터넷 프로그램을 설치해 드리기 위해 가서 14일 아침에야 돌아왔습니다. 김철환 목사님은 군에 있을 때, 크레모어가 터져서 오른손 가락의 3개를 잃은 분이십니다. 이분은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에 덩치도 있으셔서, 꼭 군대 하사관과 같이 느껴지는 분입니다. 오늘은 쁘사 트마이(쁘사는 시장이라는 뜻, 트마이는 新이라는 뜻, 곧 new market이라는 프놈펜에서 가장 큰 시장 이름입니다.)에 갔었는데, 이 분은 길거리의 구걸하는 모든 장애인들, 아줌마들과 다 알고 지내는 듯합니다. 참 밝고, 선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분의 두 아들은 이제 고2(공부를 잘해서 월반을 했다고 합니다)인 주찬(주를 찬양)이와 중학생인 신찬(하나님을 찬양)이 인데, 아주 훤칠하며 잘생긴 친구들입니다.
오늘 시장에 가면서, 이곳 마오쩌뚱 거리보다 훨씬 번화한 정부청사 앞쪽과 시장 주변을 가 보았습니다. 이곳의 시장과 가게에서는 외국인이 물건을 사러 오면,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에,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교포 중 어떤 분은 0.5달러짜리 수박을 10달러나 주고 샀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여름에 수박이 만원씩 하니까, 전혀 의심치 않고 샀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는 물건을 사러 갈 때는, 먼저 현지인 스텝에게 대충 물건값을 물어보고, 가격을 짐작하고 4,5군데의 가게를 거쳐가면서 깎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김도완 전도사와 제가 자전거를 사기로 했는데, 100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기 때문에, 악착같이 깎으리라 각오를 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130,120달러 달라고 하던 자전거를 100과 90달러에, 85달러짜리는 80달러에 깎아서 샀습니다. 사는데 거의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가격에 잘 샀다고 합니다. 김철환 목사님은 그전에 이보다 훨씬 못한 것을 120달러에 사셨었다고 합니다. 낮에는 자전거를 타고 일을 보고 구경을 하려고 합니다.
시장에서는 손은경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엄청 큰 새우를 보았습니다. 이곳 강에서 잡은 펄펄 뛰는 생선을 방망이로 때려서 큰 칼로 썰어 담아 주는데, 아줌마의 칼 솜씨가 거의 예술입니다. 생선의 비늘을 도려내는데, 그 큰 칼로 마치 사과 깎듯이 슥슥 베어냅니다. 찹쌀과 콩을 섞은 죽과 옥수수와 찹쌀을 섞은 죽을 먹어 보았는데, 향이 강해서 조금 괴로웠지만, 먹을만했습니다. 슬리퍼도 사고, 야채와 계란 등을 사는데, 살 때마다 실랑이를 하느라 밀고 당기며 난리입니다. 하지만 늘 김철환 목사님은 걸하게 실랑이를 하면서도, 사람이 좋아서 박하게 깍지는 못하고 비싸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곳에는 street kids와 장애인들이 우리에게 구걸하기 위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들을 보고 있기가 너무도 괴롭고 미안해서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손은경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이곳 아이들의 맑고 투명한 눈과 미소를 아직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좋은가? 막막함이 저를 누릅니다. 그들의 괴로움이나 가난을 접하면서도, 웃으면서 인사하며 서로 툭툭 치면서 대화할 수 있는 김철환 목사님이 부럽기만 합니다.
오늘은 시장에 두 번이나 다녀와서 몸이 좀 피곤합니다. 이곳은 더워서 조금만 평소보다 일을 더 하면 바로 피로가 느껴집니다. 시장에 갔다가, 우체국에 들려서 김철환 목사님이 이메일을 신청했습니다.
저녁에는 이성욱 전도사님의 환송회를 한국관에서 가졌습니다. 돼지갈비와 푸짐한 한국반찬들을 보니, 모두들 걸신들린 듯이 달려들어 먹었습니다. 내일이면 이 전도사님이 이곳을 떠나고, 제가 컴퓨터를 책임져야 하는데, 아직 여전히 막막합니다.
내일부터는 오후 수업 후에 갖는 경건회를 위해서, 미리 NIV성경으로 QT를 하고 영작을 해서 참석하려고 합니다. 조금씩 기도의 방향도 잡아가려고 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보직받기 전에 대기상태에 있는 것처럼 본격적인 일들은 하지 않고 있는데도,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서두르려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걸음씩 저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옆에서는 진이(서목사님 딸, 한국나이로 4살)가 아빠의 면도칼을 만지다가 손을 베었습니다. 막 울려고 폼을 잡는 진이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 김도완 전도사가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완전히 찬양예배 겸 축제가 되면서 신나서 맘껏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만 오늘은 편지를 접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이 나라를 위해서. 또 저와 이곳의 많은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1999년 1월 14일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