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리치바 - 2019.0802.1900
쿠리치바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아라메 극장이다. 포르투갈어 아라메(Arame)는 영어로 'wire', 우리말로는 '줄'이다. 보통 공사현장에서 가설재로 많이 사용하는 지름 48.6mm짜리 강관을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하여 멀리서 보면 '줄'을 엮어 만든 건물처럼 보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사실은 상파울루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방문을 망설였었다. 공항은 시내 남쪽이지만 아라메 극장은 북쪽 외곽에 위치하여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가보면 못내 후회할 것만 같아 우버를 잡아타고 드라이버를 재촉했다.
앞서 살펴본 버스 시스템과 꽃의 거리가 쿠리치바 시민들의 배려와 참여로 시 전체가 이득을 볼 수 있었던 사례라면 아라메 극장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다. 시민들을 위해 시에서 만들어 제공한 공공건축이기 때문이다. 본래 채석장으로 쓰이던 이곳은 광석이 모두 고갈되며 버려진 공간으로 오래 방치되어있었다. 레르네르 시장은 이 도시의 유휴공간을 놓치지 않고 지형적인 특성을 살려 물을 채우고 2,400석 규모의 대규모 공연장을 짓도록 했다.
공사는 단 2개월 만에 신속하게 완료되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게 빠른' 공사 속도다. 공연장이라는 기능에 충실하도록 평면 형태를 원형으로 단순화하고 값싸고 다루기 쉬운 재료인 강관(steel pipe)을 채택하여 공기(工期), 비용, 구조, 그리고 미(美) 모든 면에서 영리하게 활용했다. 자세히 보면 건축은 물론이고 객석 의자 같은 작은 부분까지도 강관이라는 재료적 이점을 극대화했다. 기둥 사이에 틈을 두어 커튼을 끼워두게 만든 건 누구의 재치였을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기발함마저 구석구석 녹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공건축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초기 사업구상 단계에서부터 예산확보, 의사결정, 시민사회와의 갈등, 지난한 행정절차 등 셀 수 없이 많은 난관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돈도 시간도 낭비됨은 물론이고 지어지는 과정에서 본래 취지가 변질되어 버리거나 완공될 즈음에는 그 필요성이나 의미가 퇴색는 경우도 많다. 아라메 극장은 그런 리스크(Risk)를 애초부터 시장 재량으로 배제해버렸다. 지난 30년 간 쿠리치바를 만든 지도자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물을 짓기도 전부터 불필요한 고민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일단 빠르게 지은 뒤 시민들이 직접 사용하면서 그 의미와 용도를 찾아가도록 했다. 실리보다는 실속을 택했고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찾은 그날도 다음 공연 연습이 한참이었다. 객석에 앉아 잠시 경청해보는데 투명한 공연장 벽 너머로 보이는 암벽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더라. 세상 이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궂은 날씨에도 이곳을 찾아 음악과 사람, 음식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의 표정 속에서 이 건축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만족도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힙(hip)하고 멋진 문화공간을 쿠리치바 시민들은 '공공시설'로서 공짜로 누리고 있었다.
사실 쿠리치바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녹지면적, 생태계 보전, 쓰레기 처리와 자원 재활용 시스템 등 미래 도시의 주요한 가치와 관련된 부문에서 아직도 수많은 도시의 롤 모델로 건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짜리 짧은 여행이라 더 많은 곳에 갈 수도, 볼 수도 없어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도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적어도 내가 나고자란 서울이라는 도시의 많은 것들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보고 만들어졌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쿠리치바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비로소 서울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또다른 시야가 열린 것만 같았다.
'꽃의 거리'에서 '아라메 극장'으로 이동을 위한 우버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시야에 들어온 택시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이 택시 색깔이 서울의 그것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참고로 서울시는 지난 2015년 '서울색'을 공식 제정하고 모든 회사택시의 외관 색상을 '꽃담 황토색'으로 전격 채택한 바가 있다. 이 주홍빛 색상의 이름이 '서울 꽃담 황토색'인지, '쿠리치바 오렌지'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다만 분명한 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보았고, 어쩌면 미래 또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