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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트다움 Mar 15. 2024

지금, 돌보기

돌보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엄마가 아이를 돌볼 때를 떠올려보자. 필요를 돌본다고 이야기할 때 보통 그 필요에 해당하는 것들은 배고픔, 배변, 춥고 더움, 가려움, 아픔 등 육체적으로 아이가 느끼는 불편함에 대한 돌봄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이유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커가면서 화와 짜증 대신 어떻게 달리 표현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감정적인 돌봄까지 모두 포함된다. 가장 가까이서 오랜 시간 서로 돌보는 관계가 되는 것이 부모, 때로는 배우자가 되기도 하고 그 관계가 평생 나에게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으로 나의 필요가 완벽히 채워지지 않고 반드시 나 스스로가 나를 돌보아야 하는 부분이 남는다. 특히나 감정, 마음이 그렇다. 


돌보는 것에도 분명 특별함이 있다. 식물을 키우는 것만 봐도 어떤 사람이 키우는 식물은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죽은 듯했다가도 새잎이 돋아난다. 반면 어떤 사람은 키워보겠다고 가까이 두는 식물마다 백이면 백 죽어나간다. 하다 하다 다육이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고 한 가지를 잘 돌보고 키우는 사람이 다른 것들도 잘 키운다는 일반화는 위험하다. 그저 무엇이든 잘 돌보는 것에는 분명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할 뿐이다. 잘 돌보는 사람은 민감하지만 예민하지 않다. 필요나 상태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지만 감정 처리가 매우 성숙해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다는 말이다. 공감력이 뛰어나서 이해해 주고 마음을 알아주니 억울했던 마음도 이내 사그라든다. 그렇게 타인을 돌본 경험이 있다면 나 자신에게도 같은 돌봄을 베풀어보자. 내 감정을 민감하게 살펴 알아주고 그 감정들을 성숙하게 처리하여 반응하는 연습을 반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참고 기다려주자.



마음을 돌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내 마음을 가장 가까이서 돌보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하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공격이 되는 생각들을 멈추는 것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거절을 연습하는 것, 나 스스로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실수에 자책하지 않고 관대해지는 것 그리고 체력만큼이나 마음력에 관심을 갖고 몸과 마음을 함께 쉬어가는 것 등 마음을 돌보고자 하는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살자는 말도 아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은 실천들로 내 마음을 돌보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필요한 것임을 인지하게 되고 그로부터 배려가 시작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건강한 관계가 되어갈 수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리의 노력에 반드시 보답을 한다. 노력을 하면 내 상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고 참고 살면 또 하루의 시간이 간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을 미루다 미루다 끝내는 돌보아야 한다는 필요조차 잊고 살아간다. 당장 급하지 않아서, 귀찮아서,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라서, 해야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아까워서 등 수많은 이유로 가장 중요한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은 회복까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괜찮다'는 말로 힘듦을 자꾸 삼킨다.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무언가를 미루는데 익숙하다.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보다 미루는 것이 더 편하기도 하고 살아오던 방식에 변화를 주어 그것이 몸에 배고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새롭게 마음먹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당장 돌보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돌보는 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말이라기보다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데 간과하기 쉬운 쉼을 자꾸 미루는 습관을 점검해 보자는 말에 가깝다. 


쉼을 잃으면 삶을 잃는다. 그 분명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제대로 된 쉼을 갖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쉼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나의 쉼을 점검하기에는 쉼이라는 것이 어려워서 미루는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효과나 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축소시키는 것이 더 쉽다. 우리가 쉼을 미루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어려워서 미룬다기보다, 그 중요성을 모른다기보다,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잘 챙겨지지 않고 쉰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된 쉼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지금 이어야 한다. 질 높은 쉼이 나의 삶의 질을 끌어올려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지금이 아닐 이유는 없어 보인다. 나는 어떤 쉼에서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떤 쉼이 나를 오히려 소진시키고 어떤 쉼이 나를 충전시켜 왔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미 나다운 쉼을 알아가고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한 가벼운 탐구를 시작하고 싶은가? 그 시작은 나에게 맞는 쉼을 찾는 것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맞는 쉼을 끌어안고 나의 감정을 소모시키는 것들에 거절하고 나의 인간다운 실수들에 너그러워지는 것만으로도 내가 아는 나라는 사람의 원은 점점 넓어져간다.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순간은 어찌 보면 내가 가진 역량을 끌어올려 최대치로 발휘하고자 산처럼 솟아 긴장한 어깨에 힘을 주는 순간이라기보다 힘을 빼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여 고인 감정의 물이 흐르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는 순간이 아닐까. 날숨에 '하아...' 하고 막혔던 숨이 터져 가슴이 시원해지는 순간 그때서야 날것의 나와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질문하자. 알아가자. 그렇게 나스러운 쉼을 찾아 쉬어가자. 방해물은 자꾸만 거두어주고 지금 당장 '쉼'으로 소소하지만 진짜 나와 만나는 유레카를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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