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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Aug 23. 2021

우리집 그 골목길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예전 우리 집은 골목길 맨 첫 집이었다. 연년생인 동생과 나는 당시 국민학교를 다녔고 막내는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골목 안쪽으로 같은 또래들이 두 가구쯤 더 있었고 길 건너편으로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골목 안으로는 마주보는 형태로 집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첫 집인 우리 집의 맞은편만 유일하게 공터였기 때문에 동생들과 나는 하교 후에 그곳에서 저녁 먹을 때까지 놀았던 기억이 난다. 고무줄놀이, 돌로 하는 공기놀이, 비석치기, 그것도 아니면 그저 흙을 팠다가 덮으며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모여들면 공터에서 도로까지 나가 놀았다. 도로라고 하지만 차들이 많지 않았던 때라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얼굴만 아는 아이, 얼굴도 모르는 아이까지 다 모여들어 편을 나눴고 오징어 땅도 하고 진돌 놀이와 얼음땡도 했다. 잘 모르던 아이와도 같은 편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보면 해가 저물었고 “00야, 안 들어오나” 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각자의 집으로 하나둘 돌아갔다. 


 중학교 배정을 받고 처음으로 우리 골목과 도로를 벗어나 직선으로 쭉 뻗어있던 길을 따라 고개를 하나 넘었다.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예전처럼 무작정 뛰어놀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농구대 주변에서 놀았고 여자아이들은 교실 복도에서 수다를 떨었다. 누가 예쁘고 누가 공부를 잘 하고 어떤 선생님이 별로이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하는 이야기들을 쉬는 시간 10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 했다. 얼굴을 비교하고 성적을 비교하고 잘 사는 정도를 알아가고 가슴 두근거리는 아이가 생겼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터에는 철물점이 들어섰다. 철물점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골목에 나와 놀고 있는 아이들은 볼 수 없었다. 고등학교는 행정구역이 달라 걸어서 다닐 수 없었고, 당시 학교 매점에서 파는 회수권을 사서 등하교를 했다. 매달 월례고사를 치르고 나면 교실 벽면에 등수가 붙었고 욕심과는 다른 성적으로 괴로워하며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10시를 넘겨 집으로 돌아오면 골목은 그저 어두웠고 나는 얼른 불 켜진 마당으로 들어서며 등 뒤로 대문을 닫아버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그 집을 팔고 새로 지은 이층집으로 이사를 했고, 몇 년 후 다시 가 보았을 때는 일대 주택이 모두 헐리고 상가로 바뀌어 있었다. 당연히 골목은 사라졌고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 매끈한 아스팔트가 덮여있을 뿐이었다. 


 골목을 떠난 아이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얼음땡을 하며 술래를 피해 서로를 구해주던 아이들은 가로등과 CCTV, 펜스가 있는 안전한 등하교 길을 요구하는 학부모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기억에서 까마득히 멀어져 있던 골목길은 오랜만에 꺼낸 어릴 적 찍은 사진 한 편에서 여전한 그 모습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스파트를 모르는 말간 골목길, 그 위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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