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맹세-필립 허모진스 칼데른, 1856년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발칙한 책을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결혼은 약속 아닌가? 어떻게 그 약속을 깰 수가 있지? 나는 국룰을 깬 여자의 남편이 너무 불쌍했다.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적 룰에 너무 익숙했던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에게도 남편인 본인과 마찬가지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혼비백산한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너 미쳤냐고 묻는 남편의 말에 나 역시 속으로 ‘진짜 저렇게는 못살지.’ 싶었다. 결혼 근처에도 못 가본 나는 남편의 심정에 120% 공감하고 있었는데 이미 결혼하여 애가 둘이나 있는 선배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에? 정말요?
그 말, 진심인가요? 본인 남편이 결혼했다 하더라도?
물론 난 선배의 가정사는 알지 못했고(당연하달까, 선배 부부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당시 선배의 ‘아내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말을 듣고 잠시 침묵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그럴, 수도 있나?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죠. 그건 사회적인 약속인데. 보통으로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잖아요. 본인이 그렇게 특별한 결혼관을 가졌더라면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에게 말했어야 공평한 거 아닌가요?”
시간이 흘러 그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역시 무수한 논란거리를 만들어냈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그 책이 가진 힘은 컸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결혼한 친구가 말했다.
“난 아내의 심정이 완전 공감 가. 아니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결국은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 절차일 뿐,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거라고 생각해.”
역시 애 둘을 가진 친구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 희한했다. 이미 결혼이라는 제도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그 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뭔가 부조리하게도 느껴졌다. (겪어 보니 더 절절하게 느꼈다? 고 이해해야 하나.) 친구의 주장은 대다수의 기혼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회 시스템 전복을 꾀하는 혁명가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기혼자도 아니었건만 나 역시 처음 친구의 주장을 듣고는 적잖이 불편했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은 옳았다. 게다가 긴 인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한때는 졸혼이라는 말도 유행했고 황혼이혼은 증가 추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재작년인가 작년에 한 다큐멘터리에서 폴리가미(polygamy)를 다루는 것을 얼핏 봤다. 미국이었는데(역시 이런 것에 선진?) 온&오프라인 모임을 같이 하고 있었다. 부부 및 커플은 서로의 ‘다자간 연애(polyamory)를 인정한다. 그래서 속이는 것이 없다. 한 부부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고 심지어는 한 지붕 밑에서 3명이 생활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아내에게 질문이 갔다.
기분이 나쁘거나 힘들지는 않았는지?
“맨 처음에는 좀 견디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죠.”
오, 성숙한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의 오프라인 모임도 흥미로웠다. 커플이 참석하여 다른 상대와 마음이 맞아 손을 잡고 스킨십을 해도 표정의 변화는 없다.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설마 촬영 중이라서 연출한 것은 아니겠지. 3인용 소파에 커플이 나란히 앉아 있고 아내 옆에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커플의 손이 아닌 그 남자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자간 연애, 일부다처, 일처다부의 제도를 따른다면 이 스냅숏이 가장 보통의 사랑을 잡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고 여행을 가고 많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의견 차이로 싸우게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환희가 하찮은 다툼과 불화가 주는 상처보다 훨씬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그의 마음이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아마 필립 허모진스 칼데른의 ‘깨진 맹세’에 나오는 여인과 같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가까스로 서 있다. 벽에 기대어 오른손으로 벽을 부여잡고 연인의 변심을 벽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로 확인하면서. 꽉 조인 의상에 더해 이제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몸은 떨리고 눈앞은 핑핑 돈다. 이게 꿈이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제발, 이게 현실의 일은 아니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여기서 기절하는 꼴사나운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저들이 나를 발견하겠지. 연적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기 싫다.
허름한 나무문 뒤로 보이는 남자는 훤칠해 보인다. 꼴값을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그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대는 한없이 좋을 것이다. 꽃인지 열매를 들어 상대에게 보여주고 있다. 깨진 나무판자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입꼬리는 웃음을 띠고 있다.
“알아요? 당신이 예쁘다고 했던 이 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아름다워요.”
남자는 뻔한 말로 상대를 희롱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짐짓 모른 척 그냥 그 꽃을 어서 주라며 까치발을 하며 남자에게 달려들고 그들은 머지않아 포옹하고 키스를 나눌지도 모른다.
벽 뒤의 여인이 깨진 맹세를 앞에서 목도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이들은 또 다른 맹세를 다짐할 수도 있다. 눈을 감았다고 그녀가 본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는 그녀가 아는 사람일까?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는 사람일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그녀의 배신감은 그 사람을 아는 만큼 더 깊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 애인에게 배신감을 짙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에서, 벽을 쥔 손에서, 코르셋으로 숨도 못 쉴 정도로 잘록하게 조인 허리에 얹은 손에서, 나는 그녀의 절망을 느낀다.
사랑은 독점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나만이 갖고 싶고 나만이 알고 싶은 것들. 상대와 교감하고 함께하는 느낌을 나만 독점하고 싶은 욕구, 그걸 탓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떠나가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말하는 것이 아닐까.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것 역시 그 사람 마음이니까.
내가 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사랑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