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에 빠진 사랑-기타가와 우타마로,18세기경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 유행했던 목판화이다. 가부키 배우, 여인, 풍경 등 당시 삶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소재들이 등장한다. 이 우키요에가 수출품의 포장지로 사용되어 서양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화려한 색감과 정밀한 묘사를 나 역시 좋아해서 일본 도쿄에 있던 우키요에 박물관을 들른 적도 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간 박물관은 규모는 작고 컬렉션도 볼품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라리 에도 도쿄 박물관을 갔더라면 더 나았을까 싶었다. 세상은 헛된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뼈저리게 느끼며 박물관을 나섰던 씁쓸한 기억이 난다.
이 우키요에의 '우키요(浮世)'는 본래 전국시대 계속되는 내전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이승의 덧없음 등을 나타내는 단어였으나, 에도시대에 들어 사회가 안정을 찾으며, 점차 대중들의 쾌락적 삶의 방식을 일컫는 ‘부유하는 세계(浮世)’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그림’이란 뜻의 '에(絵)'와 합쳐져 대중들의 일상과 세속적 풍속 등을 그려낸 그림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두산백과의 설명을 보고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상업으로 치부하게된 상인 계층이 주 구입자였던 모양인데 장사로 돈을 모으고 집을 단장하면서 다실의 벽에 이런 그림 한 점 걸어두는 풍류는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양보할 수 없는 필수품이 될 법하다.
인기가 높아지고, 돈이 모이게 되면 인재 역시 그 영역에 모이게 된다. 전국의 ‘판화’ 좀 한다는 사람들이 우키요에를 만들면서 우키요에의 수준은 한층 높아지지 않았을까? 대담한 색 구성, 세밀한 묘사, 중국이나 우리 나라와는 다른 그림의 구조를 보면 이런 단절적인 독특한 양식은 일본이 ‘섬나라’이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그림을 봤을 때, 나는 ‘도대체 무슨 고민이 있길래’ 싶었다. 여인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삐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쉬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제목을 보고 무릎을 쳤다. ‘상념에 빠진 사랑’이라니. 상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 세상에 ‘사랑’만큼 상념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도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하루에 몇 번인지도 모르게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왜?
우리는 모두 객체로서 타인을 100%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이 불가능한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고 상대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싶고 상대가 기뻐할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머리 속에서는 자동연상기법처럼 그의 생각이 연달아 떠오른다.
‘그 말을 한 의도가 뭘까?’
‘혹시 변심한 건가? 사랑이 식은 건가?’
‘내가 만약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나올까?’
‘화를 확 내버릴까?
고개를 갸웃하게 손으로 받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머리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의 선택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그녀는 상당히 바쁜 것 같다. 화려하게 장식한 머리도, 정교한 무늬가 수놓인 옷도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려나 상관없을 것이다. 지금 그녀를 붙잡고 있는 생각은 ‘사랑’, 그 빌어먹을 ‘사랑’인 것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이 혼자서 하는 거라면 이러한 명제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타인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내 뜻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절반은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fair enough이지 않을까.
물론 머리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공평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 버리면(왜 빠진다는 표현을 쓰겠는가.) 이성은 저어기 어디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마냥 나의 이기적인 바람들이 가득차게 되는 몹쓸 상황에 맞딱뜨리게 된다. 원튼 원치 않든.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사랑은 어려운 것이다.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지. 라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은 끝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미간을 찌푸릴 만큼의 고민은 아니지만 내 사랑을 생각할 때면 쉬이 상념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나와 나의 연인이 그리게 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까. 물어 봐야 할까? 혹시 혼자만의 망상이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뭔가 나는 석연치 않다. 이 여인의 얼굴이 단순히 ‘상념’에 빠졌다고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념이라기 보다는 뭔가에 삐진 것 같은 얼굴. 특히 입술의 샐쭉한 표현에서 나는 그런 인상을 더 강하게 받는다. 만약 그냥 중립적인 ‘상념’이라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처럼 좀더 무표정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입술까지 삐죽하게 모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는 뭔가에 화가 나 있다.
‘흥, 뭐 이딴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이런 마음이 묻어나오는 표정이란 말이지. 제목과 그림의 여인이 주는 느낌이 절묘하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나 상념에 빠진 사랑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사랑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쪽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켠에서 든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나는 지금 저 그림 속의 여인이 부럽다. 저 모든 것이 바로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여인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사랑에 투정을 부리든, 사랑에 화를 내든, 사랑이 주는 엄청난 숙제를 풀고 있든, 상관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모양이다. 여인도 곧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그 사랑 때문에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혼자 실없이 배시시 웃는 멋쩍은 웃음을. 혼자서 마음을 만갈래로 갈라놓은 상념이 실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라던 노희경 작가의 말도, 사랑은 ‘자세’의 문제라던 에리히 프롬의 말도 진정으로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고로 나는 자세에 문제가 있는 죄인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