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은근슬쩍, 밀당을 못 하시는 거 아닌가요?

춘색만원-신윤복, 18세기경

by 루시

가을이 오면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사람에 따라서 봄을 타는 사람도 있고 가을을 타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가을을 타는 사람이다. 아마도 기온 변화에 따른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하여간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사람들이 수시로 떠오르고 떠오른 사람에게는 (되도록) 연락을 한다. 이것은 필시 내가 가을에 외로움을 심하게 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지 않을까.

그래서 가을이 오면 바쁘기도 하다. 여름의 더위가 물러가고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바람이 불어오면, 아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는 건가 싶은 스산한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나뭇잎도 색깔을 달리하고 달리하다가 우수수 떨어져 버리는 계절, 그 변화무쌍한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나만 아무런 변화 없이 오롯이 있는 외톨이 같은 느낌은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변화가 없는데, 그런 느낌이 나를 떠나기를 바란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면 따듯한 무언가가 생각나듯이 따끈한 국물 말고도 사람의 온기 같은 것이 절실해지는 것이 나의 생리다.

연애를 잘하는 사람은 나름의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일단 경계심이 없다. 그들은 순진무구하게도 이성을 잘 받아들인다. 문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입장벽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확률은 무지하게 높아진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어떤 것이 일어나도 어느 정도는 감내하겠다는 그런 열린 태도, (쓰다 보니 연애의 고수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대인배로군요.) 그런 태도가 상대 역시 무장해제로 이끄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대가 달을 가리키는데 해왕성까지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날 사람이 같은 지역에 있지 않는 경우,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미 롱디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걱정도 팔자죠? 생각을 한다는 것은 감성이 아닌 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따지고 들면 단점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따지고 재고 ‘생각을 많이 하는’ 논리적인 사람들에게는 그것 또한 여의치 않을 수 있다는 점,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선입견도 없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예단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훌륭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 감정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아마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에 상대 역시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쭉 나열을 해놓고 보니 정말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연애를 잘하는 것 같네. 다시 한번 반성 모드.

게다가 사랑에 적극적이다. 부동산 스터디 카페에 가입하고 재테크 온라인 강의를 돈을 주고 듣는 것처럼 사랑이 절실하거나 누군가 상대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는 사람도 있고 (이 대목에서 사랑정보회사는 왜 없는지 궁금)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만남의 기회를 늘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밀당의 고수들이다. 밀고 당기기, 미묘한 심리게임을 즐긴다. 줄다리기를 절묘하게 유지하지 승패를 가르지 않는다. 내가 집중하는 상대에 한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장관리라고 해야 하나? 모든 것에 여지를 남긴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매몰차게 끊어내지 않는다. 하긴 긴 인생사,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데 현명한 처사라도 볼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텐션'을 유지하며 그걸 즐긴다. 하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취약하다.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여지를 남기는 것, 상대로 하여금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것, 헷갈리게 하는 것, 이런 것이야 말로 고수의 최고봉일지도 모른다.

춘색만원-간송미술관.jpg [from :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춘색만원을 보면서 나는 바로 이 ‘밀당’이 생각났다.

春色滿園中

花開爛漫紅

그림의 좌 상단에 있는 이 문구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봄기운이 만연한 가운데

꽃이 피어 붉은 기운이 가득하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의 새순으로 보아 시기는 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꽃은 이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발그레 볼에 홍조를 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이일 테다. 그러니 이렇게 외딴곳에 둘이 같이 있는 거겠지. 여인의 망태기에 담긴 것은 뭘까? 어디서 봄나물을 캐서 오는 길은 아닌지. 남자가 관심 있는 것은 봄나물이 아닐 것이다. 필시 봄나물을 캐어온 여인의 손을 잡는 데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어데서 오는 길이요?”

“저어기 쑥이 돋았다 하여 캐어 오는 길이요.”

“어디 한번 좀 봅시다.”

두 남녀는 서로를 곁눈질로 응시하고 있다. 정면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부끄러움일까? 아직은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 단계여서 그런 것일까? 얼굴은 기대감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저 남자가 과연 쑥에 관심이 있나? 아니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남자 역시 여자가 망태기를 살짝 옆으로 민 것에 용기를 얻어 그 속으로 손을 뻗고 있다. 지금 남자의 마음속에는 여린 쑥보다 더 밝은 빛이 희망으로 움트고 있을 것이다.

여인은 남자의 청을 내치지 않았다.

이런 길거리에서 무슨 짓거리야? 나한테 마음이 있었으면 좀 더 근사한 곳에서 마음을 전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렇게 재지 않았다. 그저 그의 관심을 달게 받고 싫지 않은 마음을 지그시 표현하고 있다. 쌀쌀맞게 그를 지나쳐 갔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여인은 쑥바구니를 가운데 두고 썸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남자 역시 솔직하게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본인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나 보다. 둘의 얼굴을 보면 그다지 젊지 않은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둘의 감정은 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밀당을 하는 두 남녀, 이제 막 뭔가를 시작하려는 커플, 간 보기에 돌입한 그들의 눈에 상대를 뺀 것은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올 테지. 봄바람처럼 안온하면서 간지러운 사랑의 바람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향해서 불어오고 있는 것 같다. 망태기를 밀고 당기면서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은근하게 밀어주고 당기면서 그렇게 사랑은 시작된다.

겨울의 막바지,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봄이 오면 나도 한번 밀당의 텐션을 느껴보자며 폼을 잡는 중이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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