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얀 반 에이크, 1434년
5월은 결혼하기 좋은 계절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기온은 온화하다. 아기 얼굴같이 연한 연둣빛 잎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그저 밖을 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인 것이다. 그러니 잔치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우리를 감싼 환경 자체가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5월이 계절의 여왕으로까지 칭송을 받는 데에는 다 이유 있다.
5월의 신부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꼭 5월이 아니어도 신부가 되는 것은 아마도 가슴 벅찬 일일 것이다. 서로가 사랑을,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혼자도, 미혼자도,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이 주는 그 기분 좋은 느낌, 긴장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서로 간의 관계는 달콤한 자극처럼 당사자들을 묘하게 끌어당긴다. 많은 사람들이 밀당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하게 되는 이유도 관계에서 오는 복잡다단함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이십 대 때에는 사랑도 결혼도 마냥 달콤한 것으로 생각했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만큼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생활이 가지고 올 길고 깊은 속내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감정에 충실할 따름이다. 나의 눈에는 사랑하는 상대의 존재만 120% 꽉 차게 들어온다. 다른 것은 너무 하찮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밥을 먹여주고 사랑이 나를 지탱해준다. 실화 탐사대에 나올 것 같은 파국으로 치달은 커플의 얘기를 들어도 ‘그래?’라고 귓등으로 흘려보낸다. 왜냐,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미성숙함 믿음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 친구의 이야기, 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지?’
너무 많은 직접/간접 경험은 결혼이라는 위대한 결심을 미루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너무 많이’ 알아버린 자의 비극이다. 싱글들은 이미 싱글의 라이프에 상당히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그렇겠죠. 만족하니 계속 싱글을 유지하고 있는 거겠죠?) 결혼이 가지고 올 변화가 현재의 만족스러운 싱글라이프 보다 더 좋은 ‘뭔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고서는 결혼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집 있고 안정된 직장 있고 좋아하는 취미 있고 심심할 시간 없다면, 이미 결혼은 저어기~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연애나 사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애하고 사랑하는 것과 결혼은 또 다른 문제다.
연애는 ‘감정’의 문제이고 결혼은 ‘생활’의 문제다. 연애에서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되고 결혼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그의 단점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가 기준이 된다. 생활이라는 것은 타인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빼고 저건 좀 더하고, 이런 식의 타협이 인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평생을 걸쳐서 만들어진 습관은 더더욱 변하지 않는다. 내가 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개꿈은 애당초 꾸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에도 좋아하는 점보다는 싫어하는 단점에 주목하게 된다. 저 별꼴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뭐라고요? 안 되는 사람을 역시 이유가 있다고요?-_-;)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뻘 되는 추남과 딸뻘되는 젊은 여인이 결혼을 하는구나. 당연히 당시의 결혼은 연애결혼이 아니었고 여러 가지 요인이 추동하는 하나의 계약(지금은 아니냐고 말한다면 또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군요.)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좀 이상하다. 결혼인데, 아무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플랑드르 지방이라고 해도 결혼인데 침실에서 거행한다고? 너무 이상했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볼록 솟아오른 신부의 초록색 치마를 보고 임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간이 결혼식이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전 아무래도 화려한 결혼식보다는 뱃속 아기의 안정을 생각하게 되어요.”
성마른 나이 든 남편도 사랑스러운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대로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 같은 추남도 이렇게 아리따운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 만방에 알리고 싶었지만 뱃속의 아기도 중요하다. 알리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하자. 그러면서 그는 또 흐뭇해졌을 것이다.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마음이 깊은 아내에게 더 깊은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음산한 포스를 풍기는 검은색 모자를 쓴 신랑과 대조되게 5월의 신록을 닮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생생한 신부는 그야말로 각렬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랑의 몸을 감싸고 있는 보드라운 모피처럼 그는 겉보기는 성말라 보이지만 아내에게만은 속정 있는 남편일까? 그런 남편을 수줍은 듯 곁눈질로 응시하고 있는 신부는 지금 이 순간, 남편과 아내로 거듭나는 이 순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겠지? 뭔가 납득이 안 되는 ‘결혼식’ 그림을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그림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많은 미술작품들이 그렇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미술사가 연구를 거듭하면서 최초의 제목이나 해설이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이 그림 역시 그랬다. 결혼이라고 하기에는 장소의 부정합성도 그렇고 맞잡고 있는 손도 그렇고 결혼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지금은 ‘약혼’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치 않겠냐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약혼은 결혼 정도로 계약의 강도가 강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을 약속하는 것이니만큼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남긴 것이고 거기에 증인이자 화가로서 ‘얀 반 에이크’가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림 뒤편 거울 위에도 ‘글’로 새겨져 있다. 신랑인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얀 반 에이크는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오반니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모피 무역으로 상당한 거부가 되었다고 하니 얀 반 에이크를 후원했을 수도 있고 에이크가 유화 물감을 개발하는데 조력했을 수도 있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면 사람은 뭔가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린다. 지오반니도 배를 채우는 일 말고 다른 것을 채우는 일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왼편 열린 창문으로는 빛이 들어온다. 창문 위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역시 지오반니는 돈이 많았던 모양이다. 촛대에는 초가 하나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다. 미술사학자 어윈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이는 성실함,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결혼에의 맹세를 의미하고, 거울 우측 가구 기둥의 상단에 있는 나무 조각은 임신을 원하는 여성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가렛이며(그 옆에 걸린 것은 밀짚 같은 것으로 만든 먼지떨이, 맞겠죠?), 강아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신실함을, 바닥에 벗어놓은 신발은 결혼식이 수행되는 공간의 신성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신발을 잘 안 벗는 서양인의 관습을 생각한다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나 싶다. 앞쪽의 나무로 만든 딱딱해 보이는 신은 신랑의 것일 테고 뒤편의 폭신해 보이는 빨간 신은 신부의 것 같다. 미술사학자 장 밥티스트 브도에 따르면 신발은 예물을 교환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선물하던 물품이었다던데 장식 없는 신랑의 신발에 비해 화려한 신부의 신발을 보고 있노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역시 뒤편의 ‘거울’이다. 거울에는 이들의 뒷모습이 볼록거울처럼 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부 외의 두 명의 사람이 더 있는데 이들이 증인이자 이들 중의 한 명은 분명히 얀 반 에이크일 것이다. 거울 주위를 둘러싼 장식은 예수의 수난(보다는 일생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생애가 수난 일색이었다고 한다면 또 할 말은 없지만)이라고 한다. 예수의 수난. 난 항상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결혼생활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겠지. 그럴 때마다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잘 견뎌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홀로 생각해본다.(얀 반 에이크도 굳이 그렇게 열심히 거울의 테두리 장식을 그린 것은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서로가 사랑을,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두 손을 맞잡고 이겨내리라는 약속을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