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솔-프란시스코 고야, 1777년
2018년만큼 더울 거다. 그래, 나도 그 정도는 피부로 예감했다. 해가 진 후에도 대기 중에 남아 있는 열기가 작년과는 사뭇 다른, 심상치 않은 ‘후끈함’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돔 현상이라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돔’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니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생각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혹서는 견디기 어렵다.
2018년에는 정말 기록적으로 더웠다. 아이스팩을 수건에 말아서 품에 안고 잔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여름은 아직까지는 아이스팩을 껴안지 않고 있으니...... 그 정도는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며 위로를 삼아 본다.
친구는 한 여름의 땡볕더위가 인생의 ‘한창’ 때를 나타내는 것 같아 좋다고 하지만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선천적으로 땀은 잘 나질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땀이 나는 것을 더 질색한다. 추위는 방한이라는 개념으로 옷을 더 껴입거나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데 더위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싫다. 인생의 한창 때라는 생각, 절대 들지 않는다.
“동남아에 갈 일이 없겠네.”
“동남아에 더위 때문에 찾아간 거 아니거든?”
“난 약간은 그 열기를 느끼기 위해서 간 것도 있어.”
이런 친구의 말을 들으면 역시 우리 인간은 저마다 다른 ‘나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한 때는 여름의 불볕더위를 가리기 위해서 양산을 열심히 쓰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waterfront’라는 브랜드를 만나고 나서였다. 그야말로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세상에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거야?라고 쓸 때마다 신통방통해하며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실외로 나갈 때면 수시로 양산을 펼쳤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것도 한 3년을 하고 나니 안 쓰게 되었다. 우양산 겸용이라 우산으로만 쓰고 있다.
왜 안 쓰게 되었는가.
당연히 귀찮아서다. 물론 강렬한 자외선이 노화의 일등공신이라는 것은 너무 잘 알지만 더운 여름, 뭘 든다는 것 자체가 어느 순간 싫어졌다. 그래서 그토록 사랑하던 워터프런트도 들지 않고 오로지 빨리 걷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니면 선글라스를 쓰거나. 실내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스스로에게 비타민D를 선사할 기회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아예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나서는 일이 실상은 더 많다.
하지만 올여름은 다시 찾아온 불볕더위에 양산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나도 다시?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양산을 쓰면 그늘이 생기고 더위는 1도 정도는 물러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파라솔을 주제로 가장 낭만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이 그림을 고를 것이다. 나뭇잎의 싱그러운 녹색빛을 닮아 시원해 보이는 파라솔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받치고 있는 그림. 앳된 얼굴의 여인의 얼굴에는 사랑받는 사람만이 가지는 자부심이 보이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 잘 보고 있죠? 저 이런 여자예요. 이렇게 대접받는 사람이라고요.’
파라솔 밖으로 뻗은 그녀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다.
“후안, 굳이 수고스럽게 파라솔 들고 있지 않아도 돼요. 제가 그냥 부채를 펼쳐서 햇살을 가려도……”
그녀는 연인에게 이런 말을 건네며 부채를 펼치는 시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리아, 내가 당신에게 그런 수고를 시킬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팔도 타겠어요. 어서 부채 내려요.”
좌상단에서 비쳐오는 햇살은 이 연인들의 사랑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한여름, 바람 부는 들판에서 연인은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속삭이며 의미를 부풀리고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하면서 사랑의 크기를 키울 것이다. 이들의 텐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인의 무릎에서 피서를 보내고 있는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난 예쁘게 미화하지 않을 테다.’ 이런 결의가 느껴진달까, 그런 느낌을 받는다. 비단 고야만이 아니다. 벨라스케스도 그렇고 피카소도 그렇다. ‘미화’ 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의 이 화가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다. 한없이 선이 고은 이쁜이들을 다량으로 생산해낸 이탈리아의 화가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물론 파라솔의 연인들은 사랑스럽다. 여인의 큰 눈망울을 보라. 앤 해서웨이처럼 커다란 눈동자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가득해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여인을 꼭 보호해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한다. 너무 강렬한 햇살에도 살성이 여려서 나중에 고생할까 봐 그의 연인은 저렇게 자신이 타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파라솔을 지극정성으로 받치고 있는 것이다. 백설공주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하늘색 상의에 노란색 치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하지만 허리춤에 손을 얹고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남자는 코가 길다. 좀 더 낭만적으로 각색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프란시스코 고야는 그런 화가가 아니다. 얼굴은 작지만 이목구비의 균형이 긴 코로 인해서 깨져 있다. 물론 남자가 매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귀염상이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얼굴이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렸다면 남자의 얼굴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혼자 해보는 것이다.
왜 이탈리아 화가들과 스페인 화가들의 붓터치가 달라지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절대미, 고전미, 완벽미를 추구했던 르네상스가 태동하고 황금기를 맞이했던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이탈리아에 반해서 스페인은 그렇지 못했다.
‘고야의 작품은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 박혀있고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이며 전환 동기는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 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두산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인데 읽고 있자니 수긍이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육체적 고통은 사람에게 다른 시각을 선사하며 전쟁이라는 큰 파고 역시 인생의 드라마틱한 전환점을 가져온다.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그 두 가지의 커다란 체험은 아마 고야의 관점을 바꿨을 것이다. ‘애써’ 미화할 필요도 ‘애써’ 거짓을 그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을 수도 있다. 세상이 아름답고 순수하고 좋은 것으로만 꽉꽉 채워져 있는 동화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는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고 덧없다’라며 되뇌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한 때, 빛나는 여름의 절정에서 사랑의 마음이 오고 가는 순간은 참으로 아름답다. 저쪽에서 적란운이 발달해서 비라도 내린다면 그들은 작은 파라솔을 우산 삼아 비를 피할 것이다. 비에 젖은 연인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기쁜 마음으로 되새길 것이다. 아직 젊은 그들이 인생에서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도 있고 이렇게 소나기가 내리는 궂은날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파라솔을 받쳐줄 만큼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은 각인되어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