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마디 말보다 한 문장의 고백

연애편지-요하네스 베르메르, 1669년

by 루시

“편지를 써보라고?”

“그래. 못 쓸 거 뭐 있어?”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대로 못 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한 캠퍼스 안에 있었고 나는 분명히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그는 나의 존재를 모르지만) 좋아하고 있었다.(그에게는 이미 수 십 명, 아니 수 백명의 소녀 팬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스무 살,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를 나이었다. 사랑에 용감, 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사람은 남의 일에는 용감해진다는 사실을, 특히 그게 남의 연애에서는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성향을 가진다는 사실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귀가 얇았던 나는 친구의 말에 ‘혹’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팬시점에 들러 편지지도 골랐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이 편지는 꼭 써서 부쳐야 한다는 자기 암시도 강하게 줬다.(어쩌면 BGM이 너무 우울했는지도……)

사실 이미 수신인은 스타였다. 캠퍼스 저 끝에 있는 체육관을 찾아가서 실내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시간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근처 여중고생까지 합류하여 체육관은 항상 경쟁자들로 넘쳐났다. 그가 운동을 끝내고 무심한 듯 웃통을 벗어젖히는 모습까지 숨 막히게 멋졌다. 몸은 그야말로 완벽한 근육질, 그러니까 그리스 조각 같은 몸매가 현실에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현타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웃통을 벗을 때에는 여기저기서 ‘꺄아’하는 교성이 울려 퍼졌지만 역시 그는 무심하고 시크하게 전혀 미동도 없었다. 짜식 더럽게 멋있구나. 라고 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멋짐 폭발하지 실력 폭발하지 인기 폭발하지, 이건 그야말로 완벽하구나. 하지만,,,,,, 동시에 저렇게 많은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졌다. 선수들이 연습을 끝내자마자 경쟁자들은 나의 우상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육탄전도 불사했다. 선물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소극적인 나는 곁눈질로 그런 경쟁자들을 견제하면서 그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그런 팬들에게 무심해 보이는 것에 적잖이 안심되었다. 그렇게 체육관 문을 힘겹게 밀고 나오면서 친구가 한 말이었다.

“편지를 써보면 어때?”

편지라. 근데 그거 너무 클래식한 거 아닌가? 음. 그래서 차별화가 되려나? 요란한 선물 포장에 직접 다가가서 말하는 것은 절대 못한다. 얼굴 보고 하는 것에 약하다. 적극적으로 나오던 경쟁자 무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팬시점에 가서 시간을 들여 정성껏 편지지를 골랐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며 이걸 골랐다가 저걸 들었다가 한참을 그렇게 골랐는지 당최 이해도 안 가지만 그 정도로 그 당시에는 마치 편지지가 나의 연애 운명을 결정할 것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팬시점을 나올 때는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나 이래 가지고 편지는 쓸 수 있겠니? 응?

편지지를 사는 것까지는 친구가 같이 해줄 수 있다. 하지만 편지를 쓰는 것은 온전히 나의 힘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재하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는 거라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 지금 생각해도 진땀 난다. 그 어떤 리포트를 쓰는 것보다도 힘들었다. 참고할 자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수업을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려웠다. 게다가 마음속에서는 계속 편지를 받게 될 그의 기분을 살피게 되었다.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받으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놀라지는 않을까? 진심이 전해져야 하는데 과연 내 편지가 그런 힘을, 마법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쓰고 또 쓰고 연애편지를 화이트로 지울 수 없으니 몇 번의 편지지를 버린 끝에 나는 편지를 완성했다. 너무 집중한 까닭에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아 몰라.(내가 가장 좋아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집 근처에서 부칠까? 교내 우체국에서 부치면 너무 스토커 같나?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사실 선수 기숙사에 직접 가지고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건 진짜 받는 입장에서 오싹할 것 같아서 그 방법은 쓰지 않았다. 여하튼 편지는 부쳤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어쩌면 수많은 러브레터와 선물에 내 편지는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를 받은 그의 심정은 이제 우주 저 멀리에 묻히고 말았다.

연애편지.jpg [from : jmagazine.joins.com]

그래서 이 그림을 봤을 때 나는 혼자 속으로 ‘뜨끔’했다. 마치 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대학시절의 내 짝사랑 대상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도 내 편지를 받고 저런 표정을 짓지나 않았을까?

“이게 도대체 뭐죠?”

라는 표정으로 여자는 하녀를 보고 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다리던 편지는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환희의 느낌이 그녀의 얼굴에 씌어 있지 않다. 편지를 전해준 하녀의 여유 있는 동작을 보라.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그녀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제가 말했잖아요. 곧 편지가 올 거라고.”

이런 표정이다. 마치 그녀는 일이 이렇게 풀릴 거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자의 주변을 맴돌던(대학 시절의 나처럼) 남자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누군가 마음에 짚이는 사람이 있나 보다. 어쩌면 이건 인편으로 온 건지도 모른다. 남자가 하녀에게 직접 편지를 전했을 수도 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앞쪽의 어두운 커튼 사이로 저 뒤에 두 인물이 환한 빛을 받으며 서 있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다. 오른쪽 앞쪽의 탁자 밑에는 꽤나 두툼한 악보가 놓여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악보일까 아니면 작곡하는 악보일까. 바닥에는 비와 함께 뮬처럼 생긴 신발이 놓여 있다. 하녀 옆에는 그녀가 편지와 함께 가져온 빨래통이 보이고 눈부시게 빛나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뺨은 홍조를 띤 채 눈을 치뜨고(물론 하녀가 서 있어서 그녀를 올려다본 거겠죠?) 묻고 있다.

“이게 도대체 뭐죠?”

아, 내 편지를 보고 그는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연애편지라는 것이 보내는 사람에게는 달콤하고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이라 해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뜻밖의 서프라이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겠구나. 연애편지는 보내는 사람에게는 핑크빛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냥 무채색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이 그림을 보고 다시 확인받은 느낌이다. 차라리 ‘편지를 읽는 여인”이 내 머릿속의 연애편지 이미지와 더 가깝다.

푸른옷 연애편지.jpg [woman reading a letter, from : rijksmuseum]

이건 뭐랄까, 잘못 배달된 편지의 느낌이 강하다. 연애편지의 반응 치고는 고약하지 않나. 게다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과는 좀 다른 느낌을 나는 받는다. 그의 다른 그림에서는 이런 여자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 그의 그림은 뭔가 고요하고 뭉개진 것 같은 미스터리한 느낌이었는데 이런 노골적인 표정은 처음이다. 처음에는 화가를 잘못 봤나 했을 정도다. 그림을 해설한 내용을 찾아보니 어둡고 흐트러진 실내는 여인의 사랑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 거라고 한다. 특히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에서 바다는 사랑을, 배는 연인을 상징했다고 한다. 바다 풍경 위에 걸린 그림에는 오솔길을 걷는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 역시 바다 위의 배처럼 여행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며 연인 간의 사랑을 암시한다고 하니 어쩌면 이 연인의 불안한 사랑은 곧 결실을 맺게 될지도 모르겠다. 너무 나의 개인적인 연애편지 경험에 감정 이입이 되어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만 그림이 보였나 보다.

그래도 나의 연애편지를 받아 든 추억의 상대는 적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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