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쟁이-요하네스 베르메르, 1656년
살다 보면 ‘운’이라는 것이 들어오는 때를 절감하는 시절을 만나게 된다.
갑자기 ‘일’이 떼거지로 몰려오거나(네? 그건 '운'은 아니지 않냐고요?) 친구며 지인이 너도나도 만나자고 청해오거나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거나 새로운 인연을 자꾸 소개해주기도 한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사람 운이 들어오거나 재물 운이 들어온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이성 간의 만남 운이 몰려오던 때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그때는 딱히 ‘아홉수’도 아니었고 사실 나이도 어중간해서 평균적으로 볼 때 한창 이성 간의 만남을 활발히 할 때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다니게 된 동네 체육센터에는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어르신들이 수두룩 빽빽이 었다. 그리고 아침형 인간이라 새벽시간에 운동을 하는 나는 그야말로 그 체육 센터의 ‘핏덩이’ 었다.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오지라퍼 할머니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되었다.

“샥시, 결혼했어?”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 머뭇거리고 있자니,
“생년월일 대 봐. 광주에 유명한 포목집 있어. 의사에 판사에 사람도 많아.”
의사, 판사가 왜 저에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영부영 생년월일을 불러주고 말았다.
아 이것으로 나도 생활의 달인에 나오던 동네에 있는 가게(미용실, 이불집이 많았지 아마?) 뚜쟁이 달인과 연결되는 것인가? 스프링 노트에 빼곡히 적혀 있던 수많은 사람의 신상명세에 나도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인가? 나의 신상을 냉큼 캐서 온몸을 흔들며 멀어져 가던 오지라퍼 할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에 스산한 한 줄기 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할머니의 사돈총각부터 누군지도 모를,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지인들을 통해서 들어오던 소개팅은 주로 ‘형이상학’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근데 소개해주는 사람이 바뀌니 ‘형이하학’적인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가방끈 치렁거리던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모두 장단이 있지만 일단 그 생경함에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에서 진땀이 난다. 그리고 나는 체육관 어르신께 말씀드렸다.
“어르신, 관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애써 주셨는데 좋은 결과가 없어서 송구하네요. 이제 제 짝은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진짜 감사합니다.”
어르신은 그런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그 남자들이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안정적인 직장에 사람 번듯하고(네?) 그런데 번번이 퇴짜여 퇴짜는. 나팔수 어르신께 나는 그렇게 찍혔다. 아마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는 주제도 모르고 눈만 높은 철없는 ‘샥시’로, 저러다가 좋은 시기 놓칠 사람으로 엄청 씹혔을 것이다.
그래도 그분들의 무료한 일상에 이런 ‘중매’ 역할을 했던 것은 쫄깃한 껌 같은 경험 정도는 제공했던 것이 아닐까. 홀로 위로해보곤 한다.

그 후로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닐 경우 ‘소개’는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물론 대인관계가 핀셋만큼이나 좁기 때문에 만남 자체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는 꼴이긴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의 정신없던 만남이 준 교훈은 중간에 소개해주는 사람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죠?)
그래서 베르메르의 이 그림을 봤을 때 사실 상당히 놀랐다.
‘뚜쟁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 그림은 과연 이게 정상적인 남녀 소개 방법인가 싶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맨 뒤에 있는 늙은 여인이 아마도 ‘뚜쟁이’가 아닐까. 그녀는 오른쪽의 젊은 남녀의 수작을, 케미를 호기심 있게 관찰한다. 그리고 남자의 손이 여자의 가슴에 얹혀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올 ‘소개료’에 한껏 부푼 기대를 걸고 있는 표정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뚜쟁이의 왼편의 남자는 잔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감상자인 우리를 향해서 이를 드러내며 ‘씨익’ 짓궂게 웃고 있다. 검은색 베레모를 멋스럽게 기울인 그는 어딘지 모르게 예술가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흥’ 부자 같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만남에서 뭔가 짜릿한 것을 발견한 듯도 하고 앞으로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feel’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개구쟁이 같은 그의 웃음에 적어도 ‘악의’는 없어 보인다.
이제 이 거무칙칙한 조연들에게 눈을 돌려 소개받는 남녀를 살펴보자.
하얀 모자에 노란색 옷을 밝게 차려입은 여인은 참으로 곱다. 볼연지 없이 저렇게 볼이 불그스레하게 홍조를 띨 수 있을까. 볼연지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 어울리니 부러울 따름이다.
여자는 눈을 내리뜬 채 본인의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혹시 요즘 우리가 생년월일로 궁합을 미리 보듯이 그렇게 손금으로 자신의 성향을, 주어진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소개팅남은 여인과 함께 여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내밀고 있다. 내 눈에는 손금을 읽으려는 움직임보다는 뭔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동전?)
이들 앞의 탁자에는 뭐가 놓여 있을까? 혹시 내가 좋아하는 도박판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여인이 주사위를 굴린 직후이고 남자가 베팅을 하려 한다? (4명이니까 머리수도 딱 맞지 않나요?)
아쉽게도 우리 감상자에게는 탁자 위가 보이지 않는다. 상상은 그냥 상상일 따름이다.
베르메르는 소품을 많이 그렸다. 실내의 조용하고 정적인 느낌의 그의 그림은 항상 많은 비밀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런 풍부한 콘텍스트가 많은 이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비밀스러우면서도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한 그의 그림은 바라보는 나를 항상 강하게 뒤흔든다.
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좀 이상했다. 뚜쟁이라면, Matchmaker라면 좀 더 은근하지 않을까?
뭔가 남녀의 결혼을 생각하며 연결을 시켜주는 장면으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은 꺼림칙함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그림의 원제가 ‘The Procuress’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뚜쟁이보다는 다른 번역이 맞지 않을까? 성매매 중개인?)
그렇다면 모든 것은 참 잘 들어맞는다. 젊은 남자의 노골적인 표현도, 그리고 한 건 확실하게 잡은 나이 지긋한 검은 커플의 기쁨도.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베르메르도 당시에는 화가의 수입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여관업을 겸했다고 하니 N 잡러의 선구자인 격이다.
이 그림은 베르메르의 초상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당시 그의 나이가 24세였으니까 당연히 젊은 남자에서 베르메르의 모습을 유추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베르메르 당신, 하관이 발달한 남자로군요. 남성미 뿜뿜이네요.
사실 자기 짝은 자기가 찾는 게 제일 성공 확률이 높다.(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냐고요? 그냥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이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가 좁은 경우, 숫기가 없는 경우가 해당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개’를 받는다. 하지만 잊지 말자. 소개받기 이전에 이건 꼭 확인해보자.
‘그 사람, 누가 소개해주는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