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너무 자신에게만 빠져 있지는 않나요?

추운 비너스-피터 파울 루벤스, 1614년

by 루시

보통 잘 난 사람들은 걷는 자세부터 다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깨는 쫘악 펴고 있으며 당당한 걸음걸이는 망설임이 없다. 마치 다리미로 쫙 편 것처럼 곧고 곧다. 그 누가 어떤 공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여유 있게 받아칠 것 같은 자신만만함, 이런 것이 무슨 아우라처럼 뻗어 나온다.

경험적으로 보건대 능력이 뛰어난 사람, 외모가 빼어난 사람이 그런 성향이 높았다. 물론 군인처럼 직업적인 훈련을 거친 사람들은 열외로 치고. 나 역시 한 때는 그랬던 적이 있었으나(무슨 근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혼자 만족감을 느껴서 그랬던 걸로 치자.) 지금은 자꾸만 멈칫멈칫하게 되는 자신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신화에서는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가 그런 자뻑 캐릭터가 강하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미’의 여신인 만큼 외모가 뛰어나고 그 외모는 상대에게 무조건적으로 어필하며 사랑의 결실로 이어진다. 눈빛 한 번에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고 그녀가 큐피드를 시켜 화살을 쏘는 족족 ‘썸 타는’ 관계로 발전하니 가히 대단한 권능을 가졌다 하겠다.

그렇기에 비너스를 그린 그림에는 거의 항상 그림의 중심에서 화면을 지배하며 당당하게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도 그렇고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린 그림에서도(심지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애정 행각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그녀는 당황하여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이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까, 당당하다고 해야 할까. 꿀리는 것이 없는 사람의 전형을 하고 있다고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 부러웠다. 미의 여신인 것도, 사랑의 여신인 것은 더욱.

767px-Peter_Paul_Rubens_-_Venus_frigida_(KMSKA).jpg [from : KMSKA]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놀랐다. 추운 듯이 몸을 잔뜩 웅크린 두 사람. 왼쪽 날개 달린 천사의 옆으로 화살통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이 귀염둥이 아가는 ‘큐피드’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오른쪽의 고개를 모로 돌리고 몸을 웅크린 여자는 필시 비너스일 텐데. 엉? 비너스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옹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단 말인가. 공작새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듯이 항상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며 뭇사람들을 한 단계 낮은 위치에서 보고 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저 멀리서 야성미를 뿜으며 뛰어오는 저 남자는 풍요의 신 바쿠스다. 손 가득 먹을 것을 풍족하게 들고 있다.

이 그림의 알레고리는 사랑도 물질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얻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무리 미의 여신이라 할지라도 먹지 못하고 추위를 가릴 집이 없다면 그녀 역시 한낱 굶주림과 추위에 벌벌 떨다 생을 마감하고 마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얼굴이 밥 먹여 주냐?’는 어른들의 말씀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어쩌면 그 메아리는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온 선배들의 지혜일 수도 있다. 사랑을 하려고 해도 사랑을 나눌 공간도 필요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일단 먹고살아야 가능한 얘기니 결혼을 할 때에도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밥벌이는 잘할까를 항상 우선순위에 놓고 보게 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낸 전후세대의 당연한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루벤스의 솔직함(?)과 통찰력이다. 아름답고 이상화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을 텐데 이런 허를 찌르는 통찰을 화폭에 담아낸 담대함이랄까 하는 것이 유쾌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잘 나가는 화가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잘 모르고 산 듯한데 여염집에서 일어날 법한 사랑에 대한 통찰을, 본질을 어떻게 꿰뚫고 있었을까?

사실 나는 루벤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바로크적인 극대화되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큰 것들을 본질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벤스가 그린 그림을 보면 나의 미적 기준에 크게 부합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몸도 지나치게 비대해 보이기도 하고 얼굴 표현 역시 내가 느끼기에 아름답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극도로 컸고 당당했고 heavy 했다. 감상자인 나는 그 무게에 눌린 것처럼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달랐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져있는 비너스와 큐피드가 오래도록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특히 이 큐피드. 이 귀요미는 아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꼭 감고 있는다. 아마 이를 꽉 깨물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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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너무 춥고 배고파요. 어서 빨리 누구든 불러서 우리를 좀 구해달라고 말해봐요.”

앙칼지게 비너스를 몰아세우며 비너스가 가지고 있는 옷의 일부를 끌어당겨 몸을 덮고 있다. 오동통한 몸이 귀여움을 배가시킨다.(우쭈쭈) 추위에 땅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자 까치발을 하고 본인은 아주 성질나 죽겠는 상황이겠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귀여워서 한 입 깨물어주고 싶다. 이렇게 귀여운 큐피드라니. 혹시 큐피드, 속으로 이런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이시어, 앞으로 절대 눈가리개를 하고 화살을 쏘지 않을게요. 제가 장난친 것에 대한 벌이라면 이제 충분합니다. 앞으로는 과녁을 잘 맞혀서 화살을 쏠 테니 이제 그만 벌을 거둬주세요.’

아기 큐피드에 비해서 비너스 쪽은 좀 더 문제가 심각하다. 아니 표정이 심각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체념을 본다. 큐피드처럼 악에 바쳐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이 틀렸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체념의 표정. 마치 달관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모든 것이 덧없다고 그녀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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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요 없어. 나 혼자서는 이룰 수 있는 게 하나 없어. 잘난 얼굴 하나로는 되지 않아.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

지금 그녀는 큐피드에게 옷을 빼앗기면서도 정작 자신은 옷으로 추위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바쿠스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아무리 내가 잘났어도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런 상대의 조력이 없었다면 사랑이라는 추상이 성립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지금 절절하게 깨닫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숭고한 진리를 들려주는 이 비너스가 나는 좋다. 루벤스의 작품 중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 만으로 사나요.라고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거는 비너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맞아요. 그렇지 않죠. 그렇게 정신적인 화학물질로만 사랑이 되지는 않죠. 하지만 동시에 비너스에게 알려주고 싶다. 혹시,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건 아닌가요? 저 뒤에는 바쿠스가 달려오고 있다고. 너무 당신의 단점만 보고 있지는 말라고. 그런 단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포용해주는, 그 단점을 보완해줄 사람이 주변에 얼마든지 있으니 너무 외곩으로만 치닫지는 말라고. 귀요미 큐피드도 화살을 쏘고 당신 역시 다시 당당하게 사랑의 주연으로 무대에 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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