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번씩은 해외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자고 생각했던 내 다짐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로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강제로 2~3년동안 국내에 구금되어 버린 뒤, 나는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처럼 공항에 간다는 그 행위조차 매우 어색해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옆지기였다.
“우리도 나트랑 한번 다녀와 볼까?”
베트남 나트랑. 경기도 다낭시(?)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들 간다는 그 곳. 내 주위에서만 다녀온 사람을 꼽아도 열 손가락은 너끈히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만큼 여행 난도가 낮아 가족여행이든 효도관광이든 많이들 선호한다는 그곳. 한때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떠나던 여행 마니아였으나 지금은 방구석 랜선여행자로 퇴화해버린 나에게 오랜만의 여행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트랑으로 가는 비행기는 대체로 새벽에 편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0.5박(저가 호텔에서 머무는 숙박), 픽업-센딩(Drop-off) 서비스 등이 발달해 있었다. 우리 역시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밖에 없었기에 일을 마친 후 밤 비행기를 타는 일정으로 정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자면서 가면 된다고 했겠지만 그건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었다. 비행거리가 짧든 길든 나는 늘 비행기에서 깊게 잠이 들지 못했다. 좌석도 배치도 어찌보면 고속버스와도 비슷하나, 버스에서는 쉽게 잠에 빠져 도착할 때까지 내쳐 자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상하게도 기내에서는 깊은 잠에 들기 어려웠다. 길어야 20분. 잠깐 잠이 든다고 하더라도 이윽고 잠에서 깨 나는 비행시간 내내 지루함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번에도 역시 이륙 후 깜빡 잠에 들었으나 여느 때와 같이 번쩍 떠진 눈.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옆에 있는 창을 통해 밤하늘을 내다보았다.
사실 밤 비행기를 탄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몇 안되는 경험 속에서도 나는 나만의 즐길거리를 찾아냈다(그래야 할 수밖에 없긴 했다만.). 나는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를 참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바다인지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어둠 속에 가끔씩 콕 박혀 보이는 광(光)물질.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무엇을 위한 빛인지는 모른다. 화물을 나르는 무역선일수도, 아니면 암초에 충돌을 방지할 수 있도록 띄워놓은 경고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닷일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모두 야간 조업중인 원양어선 선박처럼 보였기에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 빛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라도 삼켜져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빛. 그럼에도 또 강인한 구석이 있어 마침내 버텨낼 것만 같은 그 빛.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반짝이는 그 빛을 보고있노라면 무엇인가 막연하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황홀해지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밤하늘을 날고 있는 상황에 저 아래 바다에서 누군가는 본인의 생업에 열심이고 있다는 사실은 여행으로 떠나고 있는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이질감이었다. 수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삶. ‘저 곳에 지금 사람이 있다. 여기서 느낄 수는 없지만 저곳에서는 분명 진한 삶의 내음이 풍겨올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생의 투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와 당장에라도 바다로 뛰어들어 그들의 삶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미지에 대한 동경. 매일같이 반복되는 내 일상과의 크나큰 괴리. 무척이나 바라면서도 어디서부터 해나가야 할지 모르는 그 막연한 삶의 과업을 나는 타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타인의 삶을 관조하며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트랑으로 가까워져 가는 밤하늘에는 두 개의 우주가 있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별이 창창히 빛나는 우주. 항상 고개를 위로 들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우주를 내 눈높이에서 보는 기분이란 참으로 생경했다. 언제라도 내 눈 앞으로 다가올 것만 같은 그 하늘과 함께, 발 아래에는 또 다른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암흑 위를 수놓는 수백 개의 하얀 점들. 일렁이는 검은 밤바다 위에 놓여있는 수많은 고깃배들. 하늘길 4시간동안 뜨문뜨문 보이던 그것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너른 밤하늘을 수놓은 저 먼 행성들에 뒤질세라 간격을 촘촘히 좁혀 오며 열대(熱帶)의 은하를 만들고 있었고, 그러한 흐름을 보며 내 마음도 따라 잔잔히 일어나는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여행을 다니면서 동해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캄캄한 밤, 수평선 위에 떠 있던 작은 빛들. 긴 어둠 위에 고고히 버티고 있던 그 자그마한 빛의 보루(堡壘). 아버지는 오징어 배라고 했었다. 오징어가 빛을 좋아한다나. 실제로 어느 직업 다큐멘터리에서 밝은 불빛을 켜고 조업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과연 나 어린시절에 봤던 그 빛을 내려다보는 사람은 있었을까? 우리의 삶을 관조하는 사람이 누군가 존재했을까? 존재했다면 과연 나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이었을까? 여러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나트랑 인근해역을 수놓던 배들 덕분에 정말 값싸고 맛있는 해산물은 잔뜩 먹을 수 있었다. 나트랑,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