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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Apr 04. 2024

우윳값을 우유값이라고 쓰면 나라가 망하는가.

"할아버지, 이상한 게 있는데요. 왜 '우윳값'이라고 쓰는 거예요?"

학교에서 돌아와 책을 읽고 있던 손녀가 입을 뾰로통하고 묻는다. 내가 봐도 이상한데 어린아이 입장에서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어떻게 사잇소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떻게 말해줄까 하고 생각을 궁굴리고 있는데 또다시 묻는다.

"책에는 '등굣길'이라고 써 있고요,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여자 병아리를 '암평아리'라고 써 놓은 거예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정하고 있는 것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토대로 한 한국의 정서법(正書法) 통일안이다.

1933년 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많은 호응을 받아 널리 사용되고 있었는데 언중言衆들의 언어생활을 반영하여 1988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게 되었다.  1988년에 개정 발표한 통일안은 한글의 표기 원칙과 문법 규칙을 현대화하고 표준화하여, 한국어 사용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보다 명확하고 일관되게 하기 위해 개정하였다. 그 후로도 조금씩 개정하고 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언어의 역사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손녀가 물어본 '우윳값'에 대한 표기는 사잇소리 현상을 반영한 표기이다.  사이시옷에 관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30항 사이시옷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받치어 적는다.
1. 순우리말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1)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고랫재 귓밥 나룻배 나뭇가지 냇가
(2)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것
     멧나물 아랫니 텃마당 아랫마을 뒷머리
(3)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도리깻열 뒷윷 두렛일 뒷일 뒷입맛

2.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1)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귓병 머릿방 뱃병 봇둑 사잣밥
(2)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것
     곗날 제삿날 훗날 툇마루 양칫물
(3)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가욋일 사삿일 예삿일 훗일

3. 두 음절로 된 다음 한자어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


  규정으로만 보면 간단하고 일정한 규칙성도 있어서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외 사례가 너무 많아 헷갈리는 것이다. 또한 어떤 말은 표기가 이해되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어려워하는 사이시옷 표기는 뒤에 오는 말을 경음으로 발음해야 할 때 사용하는데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아도 뒤에 오는 말을 경음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등굣길,  배춧국, 최솟값과 같이 사이시옷을 표기하는 경우도 있고,  개수,  수소(소의 수컷), 초점 등과 같이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모두 뒷말을 경음으로 발음하게 된다. 문제는 사이시옷을 표기하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개수, 수소(소의 수컷), 초점 등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아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이시옷을 넣어야 하는 경우는 첫째 합성어, 둘째 한자어 + 고유어 또는 고유어 + 한자어, 셋째 뒷말의 첫 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ㄴ'이나 'ㄴ,ㄴ'소리가 덧나는 경우, 넷째 앞말이 받침이 없어야 한다.  모든 한자어로 된 합성어는 사이시옷을 넣지 않는데 오직 6개의 한자어는 예외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완벽한 규정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할 때에는 정말 헷갈린다. 그래서 대학수능시험에서도 자주 출제가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이시옷 규정에서 벗어나는 예외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겠다.

소의 수컷을 가리키는 말은 '수소'라고 표기해야 한다. 이 말은 수컷을 가리키는 고유어 '수'와 동물의 이름인 고유어 '소'의 합성이고, '숟쏘'로 발음한다. 그러므로 사이시옷을 넣어 '숫소'라고 표기해야 할 것 같지만 '수소'가 표준어이다. '뱀'도 '수뱀'으로 표기하고 '숟뺌'으로 발음해야 한한다. 그러나 '양', '염소', '쥐'는 '숫양', '숫염소', '숫쥐'로 표기하고, 각각 '순냥', '순념소', '숟쮜'로 발음해야 한다. 동물의 경우 사잇소리를 표기하는 동물은 오직 이 세 동물뿐이다.


앞에서 말한 6 개의 한자어는 사잇소리를 표기한다고 했다. 그런데 '貰房셋방'이라고 사이시옷을 표기해야 하는 단어도 '月貰房월세방'이라고 쓸 때는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아야 한다.


사이시옷 표기의 예외규정을 만들어 놓은 것은 국립국어원이다. 사실 국립국어원의 입장에서도 사이시옷 문제는 어렵고 힘든 문제가 아닐 없다. 일관되게 사이시옷을 표기하거나 또는 표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단어들은 사이시옷을 표기해야 이해가 쉽고, 어떤 단어들은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아야 가독성이 좋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막내삼촌 ㅡ 막냇삼촌,  막내고모 ㅡ 막냇고모는 어떤 것이 올바른 표기일까.

사이시옷을 표기해야 할 조건은 다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시옷을 표기해야 할 것 같은데 '막냇삼촌', '막내 고모'로 표기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이 제시하는 이유는' 막냇삼촌'은 합성어이고, '쌈촌'으로 발음되지만, '막내고모'는 합성어가 아니고, '고모'로 발음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막냇동생'은 되는데 '막냇동서'는 안된다.  '막내 동서'로 표기해야 된다고 한다. 실제로 언중들의 언어생활을 놓고 볼 때 '막내고모', '막내동서'로 발음할까. 아니면 '막내꼬모', '막내똥서'로 발음할까.

'인사말'은 '인사말'로 발음할까, 아니면 '인산말'로 발음할까. 사람들은 '인산말'로 ㄴ을 첨가하여 발음하는 것 같은데 국어연구원은 '인사말'로 발음해야 하고, 그래서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앞에서 손녀가 질문했던 '암평아리'에 관한 내용도 궤를 같이한다고 보고 잠깐 말해 보겠다.

이것은 중세국어의 'ㅎ종성체언'의 여파이다. 즉 중세국어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ㅎ/이 따라다니는 단어가 있었다. 암/수(性), 살(肉), 안(內) 등등. 이런 단어들은 단독으로 쓰일 때와 달리 조사와 결합하게 되면 느닷없이 /ㅎ/이 나타난다.  이런 'ㅎ 종성체언' 중 일부는 현대어에도 나타나는데 암ㅎ+닭 -> 암탉, 수ㅎ+돼지->수퇘지, 살ㅎ+고기 ->살코기, 안ㅎ+밖 ->안팎, 머리ㅎ=가락->머리카락 등이 그것이다.


사이시옷은 사잇소리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그러나 사잇소리 현상 자체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규칙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반대말'에는 사잇소리 표기를 하지 않는데 '존댓말'에는 사잇소리 표기를 해야 하고, '예삿일'에는

있는데 '예사말'에는 왜 없는지, '숫양'은 표기하는데 '수소'는 왜 표기하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도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은 정책적으로, 실용적으로 다가서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일종의 약속이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맺은 약속이다. '아버지'라고 하자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것이다. 처음에 '어머니'라고 약속했다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이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바꾸자고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언중들 모두가 그렇게 하자고 동의해야 바뀌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들 중에는 노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사회성이다.

 

사잇소리를 꼭 넣어야 하는 말은 넣기로 하고, 넣지 않아도 되는 말은 넣지 않는 것으로 정해서 발표하고 실제로 언중들이 사용하다 보면 일반화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상치'가 표준어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상추'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 '상추'를 표준어로 삼게 되었다.


'일찌기', '더우기', '우겨넣다'로 쓰고 있던 말을 어느 날 '일찍이', ' 더욱이', '욱여넣다'로 바꿔버리는 퇴보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사람들의 입에 익어버린 말을 학술적인 입장에서 바꾸어버린 나머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멘붕'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의 조어 능력을 보여주는 말이다. 영어와 한자어를 결합하였는데도 지금 아무런 저항감이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초딩'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윳값', '북엇국'으로 표현하는 것이 규정상 맞다고 주장하지 말고 가독성이 좋은 '우유값', '북어국'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깃발', '핏줄' 같이 써야 이해가 쉬운 말은 사잇소리를 살려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장맛비 내리는 하굣길에 막냇동생과 함께 만둣국을 먹었다.""장마비 내리는 하교길에 막내동생과 함께 만두국을 먹었다."로 표기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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