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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Apr 20. 2024

11화 목련꽃그늘 아래서

내포문화숲길에서 만난 목련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제법 굵어졌고. 기어이 홀로 봄을 품고 있는 자목련을 두드렸다. 커다랗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던 꽃잎은  그 붉은 얼굴 그대로 빗방울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꽃은 저렇게 받아내는구나. 떨어지는 빗방울 모두를.'


전화기를 타고 넘어온 그의 목소리에는 가느다란 가벼움 몇 가닥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내일 다섯 시에 뵙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말간 샘물처럼 잔잔했다. 강한 흡입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 가는 알 수 없는 힘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흘러나오는 힘 아래에 가늘면서도 적은 가벼움이 느껴졌다. 섬세하게 듣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이 가벼움은 뭘까'


창을 타고 넘어온 흐릿한 빛은 그녀 앞에서 잘게 부서졌다. 조각난 흐릿한 빛의 파편들 사이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깨를 타고 내린 웃음소리는 머리카락 끝으로 조각난 빛을 다 끌어모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그 마법이 좋았다. 얼마든지 홀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제법 굵어졌고. 기어이 홀로 봄을 품고 있는 자목련을 두드렸다.


'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목월의 '4월의 노래'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를 아시나요?"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소개팅녀에게 내놓을 질문은 아니었다. 그것도 '시를 아느냐'라고 묻다니.

"시를 좋아하시나요?"

얼른 바꿔 물었다. 빗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앉아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남자에 대한 배려는 아니었다. 그의 눈길이 느껴진다. 끈적거리지는 않았어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힘든 세상이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그러나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치열하지 않았다. 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시를 읊조리고 있다.


"그럴수록 낭만적으로 즐겨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는 빗소리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시선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가 보내는 시선을 꺾어버리고 일어서야 할 것 같다.


"비가 그치면서 데리고 오는 햇볕의 걸음걸이를 보셨나요? 그 찬란한.

인생에 시가 있어야 하는 이유죠."


그녀는 벌써부터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안다. 그녀가 3초 룰에 빠졌다는 걸. 그래서 의미 없는 시간을 버팅기고 있는 것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넌지시 던지는 시선까지도 그녀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녀를 조금 더 앉혀두고 싶었다. 빗방울을 핑계 삼아.


"치열한 세상에서 시와 같은 삶은, 글쎄 여유로울까요?"


세상은,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은 그렇게 시구절이나 불러들일 만큼 여유롭지가 못하다는 말과 함께 일어서야겠다. 이 한가한 남자를 남겨두고.


3초 룰은 역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었다. 꼭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말과 행동.

그것이었다.

전화기를 타고 넘어온 그 가벼움은.

문과적 발상. 그 밍밍한 사고와 줏대 없음.

1+1은 반드시 2가 되어야 한다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도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그 몇 갈래로 흩어지고 마는 시구절 같은 마음은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남은 시구절을 건넸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만, 1+1은 2가 되어야 하지만, 3도. 4도, 때로는 0도 되어야 하지요. 그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지는 거 아닐까요."


그가 내놓은 '4월의 노래' 시구절 아래에서 비는 그쳤다. 그러나 찬란하다는 햇볕은 나오지 않았다. 흐릿한 도회지의 길을 따라 집으로 걸었다. 그 남자는 찻집에 남겨둔 채, 그동안 공유했던 시간을 모두 걷어서 느릿한 걸음으로 어둠이 깔리는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꼭 무엇인가 두고 온 느낌이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라왔다.


'잘 들어가셨는지요? 목련을 두드리던 빗줄기를 붙들고 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방은 어둠에 묻혀있지만, 와인잔에 담기는 시간은 제법 익어갈 듯합니다.'


씻고 나서 말똥말똥거리는 눈자위를 마사지하고 있을 때 폰이 딩동거렸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만,

멀리 떠나기도 하고,

어느 목련 아래에서 편지도 읽고

별도 봐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놈의 목련꽃이 방을 가득 메우고도 남아 내 마음까지 꽉꽉 채워 놓았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의 노래'가 세상을 다 차지해 버렸다. 쿵쾅거리기까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목련꽃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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