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가 노랗게 피었습니다. 아침에 보는 노랑노랑한 개나리는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단장을 했나 봅니다. 무더기로 모여들어 아침 인사를 건네지만,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총총걸음입니다. 상쾌한 아침 이미지를 즐기는 걸음은 느릿하게 걸어야 합니다. 풋풋하고 신선한 아침. 오늘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은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서는 개나리꽃보다 더 예쁜 친구입니다.
엄마는 꼭 내 손을 잡고 걷고 있습니다. 내 가방도 메고 가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덟 살 사내인데 겨우 필통 하나와 물 한 병, 그리고 1학기 동안 다 읽으려고 계획하고 있는 60권짜리 마법 천자문 한 권이 들어 있는 가방을 못 메고 갈까 봐 엄마는 꼭 가방부터 받아 듭니다. 유치원 때는 엄마한테 가방을 맡겼지만, 이제는 내가 메고 갑니다. 엄마 손도 안 잡고 가면 좋겠습니다. 나도 이제는 초등학생이니까 말입니다. 어느 정도는 나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그냥 엄마 손을 잡고 갑니다. 그것마저 안 하면 엄마가 서운해할까 봐 그렇습니다.
나는 엄마가 좋습니다. 아빠가 멀리 있어서 자주 볼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엄마에게서 나는 그 알싸한 냄새가 좋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조건 엄마하고만 같이 있고 싶습니다. 그래서 평생 엄마하고만 같이 살 생각입니다. 요즘 들어 할아버지께서 혼자서 할아버지 집에서 자고 가면 5만 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음으로는 열 번도 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눈 딱 감고 자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엄마 옷을 하나 가지고 가서 엄마 냄새를 맡으며 자고 올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사임당 아줌마를 내 지갑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죠.
엄마는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하게 해 줍니다. 읽고 싶은 책도 사주고, 내가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도 원하는 대로 사줍니다. 축구학원, 줄넘기 학원, 수영장도 보내줍니다. 친구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도 갈까 했는데, 엄마랑 영어로 말하는 것이 좋아서 안 갑니다. 그냥 엄마랑 영어놀이를 하고 놉니다. 그래서 영어도 조금 잘합니다. 누나하고 영어로 말하기도 하고, TV에서 영어로 하는 만화를 볼 때도 조금은 알아듣기도 합니다. 엄마는 내가 공부보다는 재미있게 놀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대부분을 엄마랑 보냅니다. 나는 그게 좋습니다.
늘 건너가는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6차선과 4차선이 교차하는 곳이라 통행하는 차량이 엄청 많고, 길을 건너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엄마는 횡단보도 앞에만 오면 꼭 내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내가 먼저 엄마에게 말을 했습니다.
“차도에서 1m 이상 안쪽에서 기다릴 것.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면 다섯까지 센 다음 길을 건너갈 것, 초록색 신호가 15초 이하로 남아있으면 건너지 말고 기다릴 것.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는 항상 좌우를 살피면서 건너갈 것.”
횡단보도는 엄마가 알려 준 대로 건너려고 합니다.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물론 엄마랑 같이 다니니까 문제없지만 나 혼자 학교에 가야 할 때도 꼭 지킬 겁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은서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갑니다. 요즈음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가 다니지 않아서 좋습니다. 마음대로 장난치며 걸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중학생 형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해서 조심하기는 해야 합니다.
은서는 내 짝꿍입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쁜 아이입니다. 은서가 예쁘기는 하지만 승연이보다는 조금 덜 예쁩니다. 승연이는 유치원 때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를 쓰려고 엄마를 졸라서 한글 공부를 다 마쳤습니다. 다 승연이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연이는 유치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어른들 말로 이별입니다. 가슴 아픈 이별.
은서에게는 절대로 승연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승연이는 평생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살 것입니다. 엄마는 2학년이 되기 전에 내가 승연이를 잊을 거라고 말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는 모르지만, 유치원 때 승연이가 준 편지들은 내 옷장 맨 밑에 넣어 놓았습니다. 편지를 꺼내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편지를 보면 승연이가 보고 싶을까 봐 꾹 참고 있습니다. 승연이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가슴이 막 뛰었습니다. 승연이를 생각하기만 하면 꼭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늘 학교에 가면 선생님과 어떤 공부를 할까?”
엄마가 물었습니다.
“응, 선생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고 왜 그 사람이 좋은지를 말해보는 공부를 한다고 하셨어.”
“우리 지호는 누구를 그릴 건가?”.
“엄마를 그릴 건데.”
“엄마는 승연이를 그릴 줄 알았는데?”
“승연이를 그리고는 싶은데 은서 앞에서 승연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거든.”
갑자기 걱정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엄마를 잘 그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얼굴도 못 그릴 것 같고, 손이랑, 발도 못 그릴 것 같았습니다. 못 그린 그림을 친구들, 특히 은서 앞에서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놀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지호야, 왜 울어?”
엄마는 깜짝 놀라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지호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는 내가 갑자기 우니까 놀랐나 봅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를 그려야 하는데 그림을 못 그릴 것 같아. 얼굴 동그라미도 못 그릴 것 같아. 친구들은 잘 그리는데 나만 못 그리면 어떡해? 은서도 볼 건데.”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습니다. 엄마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없으니까요.
“괜찮아. 우리 지호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데. 지난번에 포켓몬 마자용 그림도 엄청나게 잘 그렸잖아.”
“그래도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
“아냐, 포켓몬이나 사람이나 똑같은 거야.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정성껏 그리는 게 더 중요한 거야. 이제 그만 울고 교실로 가야지. 지호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엄마, 지금 내가 울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그러니까 엄마가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될까.”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엄마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습니다. 언제 맡아도 엄마 냄새는 좋습니다. 엄마 냄새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배고픈 것도 잊을 수 있고, 자신감도 생겨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체스대회를 나갈 때마다 엄마 손수건을 가지고 가서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을 때 슬쩍슬쩍 맡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개는 좋은 수가 생각납니다.
“엄마, 이제 들어갈게.”
“지호, 파이팅! 잘할 수 있을 거야.”
교문에서 엄마와 헤어졌습니다. 교실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수도장에서 가서 얼굴을 씻었습니다. 친구들이랑 선생님에게 눈물 자국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는 평소처럼 씩씩하게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지호야, 왜 늦게 왔어?”
은서가 물었습니다.
“응, 교문 앞에서 엄마랑 이야기하느라고 늦게 왔어. 오늘도 사이좋게 공부하자.”
오늘도 은서는 머리를 곱게 빗고 노란색 머리핀을 꼽고 왔습니다. 은서는 참 예쁩니다.
“그런데 너 오늘 누구 그릴 거야?”
은서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어봅니다.
“엄마 그릴 건데. 너는?”
나는 은서가 나를 그린다고 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은서를 바라봤습니다.
“나는 동생을 그릴 거야. 얼마나 귀여운데.”
나는 조금 실망했습니다. 울고 싶었지만, 교실에서는 울 수가 없어서 꾹 참았습니다.
“어제 말한 대로 좋아하는 사람을 그려보기로 해요. 그림을 그릴 때는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그려야 해요. 그림은 못 그려도 되는데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그려야 해요.”
엄마 냄새와 엄마의 얼굴과 엄마랑 같이 노는 것을 생각하며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의 머리에 은서가 꼽고 있는 노란색 머리핀을 그렸습니다.
“너 왜 내 머리핀을 그렸어?”
“아냐, 이거는 우리 엄마 머리핀이야.”
나는 은서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리고 그림 위에 ‘우리 엄마’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은서를 슬쩍 바라봤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은서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습니다.